트라우마_24
헤어졌다는 결심을 하고도 어떻게 끝내야 할지를 몰랐다. 당장 집으로 가도 모자랄 판에 그놈의 퇴사파티를 꼭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전남친 집으로 같이 돌아갔다. 전부터 먹고 싶다던 음식이 있어 같이 사러 나갈까 했는데 전남친은 혼자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사실은 전에 지원해뒀던 언론사 결과 발표가 나오는 날이기도 했다. 차라리 합격한다면 오늘부터 시험 준비를 해야 할 거 같다며 이대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전남친이 나가고 혼자 결과를 확인하는데 정말 이것마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결과는 불합격. 뭘 해도 안되는구나 싶어 절망스러웠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있는데 그대로 눈물자국이 고였다. 이러고 있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함부로 대해지면서도 퇴사파티를 하겠다며 남아있는 내가 답답했다. 그렇다한들 그의 퇴사를 누군가 떠나가는 기억이 아닌 정성껏 준비해 준 기억으로 남겨주고 싶었다. 난 정말로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사랑받는 기억을 가득 채워주고 싶었다. 사실은 내가 그런 사랑을 받고 싶었다.
전남친이 음식을 사서 돌아왔다. 서프라이즈로 준비했기에 그가 나가있는 동안 케이크를 가져올 계획이었지만 픽업시간도 애매했고 이젠 의미 없었다. 전남친에게 케이크를 준비해뒀다고 말하고 혼자 찾아오려고 했다. 그에게 퇴사파티 기념으로 케이크를 예약해뒀다고 말했을 때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내 상상이었기에 그 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업신여기는 표정으로 뭐 파리바게트? 하고 대답하던 그에게서 남은 정이 다 떨어져나갔다.
헤어지라고 등을 떠미는 것처럼 온갖 정 떨어지는 행동을 다 보여준 날인 것 같다. 뭐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도 있는 게 이런 모습들을 보여줘서 내가 정리할 수 있던 거라 생각한다. 차분하게 레터링 케이크를 주문해뒀다 말하고 혼자 가겠다는데도 굳이 함께 갔다. 처음으로 주문한 케이크를 받아드는데 놀라울 만큼 아무 감흥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는데 남보다도 더 불편한 사람과 밥을 먹는 것 같았다. 난 애초에 불편한 상황이나 불편한 사람하고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 먹고 싶어도 누군가 위를 꽉 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삼키질 못한다. 티비를 틀어놓고 식사하는데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전남친이 신경 쓸까봐 오래 씹으면서 열심히 먹는 척을 했다.
식사가 끝나고 케이크로 축하해주는 순간만 기다렸다. 이 순간을 위해서 오늘 하루를 계속 참아왔었다. 이것만 끝내고 얼른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냉장고에 넣어뒀던 케이크를 꺼내왔다. 나름대로 공들여 디자인한 케이크를 보여주고 기분을 끌어올리는데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걸 보려 하지도 않았다. 초에 불을 붙을 새도 없이 케이크는 그대로 다시 덮어졌다.
그게 꼭 내 마음 같았다. 얘한테는 뭘 준비해도 이렇게 쉽게 져버리는구나 많이 초라해지는 거 같았다. 결국 오늘 한순간도 전남친에게서 내 마음을 채울 수 없었다. 나는 이때 너무 부서져있어서 전남친이 아주 조금이라도 개선될 여지를 보여줬다면 나는 그 사소함을 붙잡았을 거다. 지금은 다행이라 느끼지만 이때는 정말 너무하다 싶을 만큼 마음이 다 깨져버렸다. 헤어지고 싶어 작정하고 내게 이러는 거 같았다.
박스로 들어간 케이크만 보며 멍해진 내게 전남친은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나는 할 얘기가 없었다. 데이트를 하다가도 전남친은 이야기를 하자고 했고 나는 숨기는 거 없이 답했다. 전남친의 말에 상처받아서 그걸 이야기했고 이미 사과도 받았지만 기분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사과를 받았으니 더 바라는 게 없는데 내 마음이 잘 괜찮아지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결국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전남친이었다. 데이트를 하는 동안에도 대꾸도 제대로 하지 않더니 밥까지 깨작깨작 먹으니 짜증 난다는 말이었다. 속이 막혀버려서 밥을 삼키지도 못하는 날 보면서 쟤는 저런 생각을 했구나 새삼 신기하기도 했다.
데이트할 때도 내 기분을 맞춰주려는 건 겨우 30분 정도였다. 오히려 이후에는 내가 그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억울했을까. 결국 그 불편한 시간도 전남친 본인이 자초한 잘못이었는데. 그가 무슨 잘못을 했든 나는 그를 위해 무조건 웃고 있기를 바란 걸까.
이젠 정말 끝이었으니 모두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힘들어할 때 위로해줄 수 있는 건 너무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내 책임으로 돌리니 솔직히 좀 충격받았었다고. 하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다시 기분 맞추려고 노력했는데 이후에 태도를 바꾼 건 너 아니냐고. 마트에서도 네 물건을 찾아보려고 물어보고 있을 때 그렇게 가버리니 많이 비참했다고.
결국 그에게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당장 헤어질 자신이 없어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못해서 내게 그걸 떠넘기는 거 같았다. 막상 시간 갖자고 이야기하면서 엉엉 우는 나에게 그는 당장 헤어지는 건 아니잖아 하고 여지를 남기려 했지만 미친듯이 헤어지고 싶었다.
그를 두고 이렇게 가버리는 게 너무 슬펐다. 이 퇴사파티가 그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을까봐 걱정됐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더 가여웠다. 내가 이런 취급받아선 안되는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 데려다주겠다며 붙잡았지만 혼자 가겠다고 거절했다.
전남친의 집을 나온 순간부터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결국 말했구나 후련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비참함이 몰려들었다. 결국 나는 일도 친구도, 마지막까지 믿어보고 싶었던 사랑도 모두 놓쳐버렸다. 나 자신이 완전히 잘못된 사람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