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쉽게 대하는 사람

트라우마_23

by 김물꽃

전남친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내게 가정사를 털어놨었다. 그 무거운 이야기들을 모조리 쏟아내는 게 사실 조금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가족들한테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쓰러웠다.


한편으론 내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해서 그 사랑을 내가 채워주고 싶었다. 전남친이 아무리 상처되는 말을 내뱉어도 나만큼은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내 그런 사랑이 언젠가 그를 변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날 전남친의 퇴사 파티를 준비했었다. 전남친은 성인이 되고 바로 가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계속 일을 해왔다. 영화일은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일이라 선택한 것일 뿐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라고 했다. 이번 작품을 끝으로 영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 했을 때 그 길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너는 이런 대접받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처음으로 레터링 케이크를 주문했다. 전남친 집 근처 레터링 케이크를 알아두고 서프라이즈로 준비했다. 앞으로의 길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담아 예쁘게 디자인했다. 일을 그만둔다 해도 축하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전남친에게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걸 듬뿍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데이트하러 가는 길에 관계의 끝을 생각하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거지 같은 기분을 누르면서도 퇴사파티까지는 버티려고 했다. 끝을 내더라도 최대한 상처받지 않게끔 잘 마무리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작품에서의 마무리가 아쉬웠기 때문에 전남친하고 끝을 낼 때 최선의 선택을 내리려고 집착하게 된 것 같다.


퇴사파티를 위해 저녁 시간까지 버틴다 해도 마음은 이미 떠났으니 기분이 나아질 리 없었다. 데이트 장소에 도착했을 때 처음엔 전남친도 내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나로서도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이미 사과를 받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이야기도 다 했다. 해야할 건 다 끝냈는데 마음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더 바라는 게 없었다.


그 상태를 알고 있으니 전남친에게 화를 낼 것도 없었고 더 쏟아내고 싶은 감정도 없었다. 평소보다 얌전했다고 해도 그 태도가 내겐 최선이었다. 더 기대되는 것이 없었다. 30분이 지났을까. 자신이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풀어지지 않으니 결국 또 내 탓으로 돌렸다. 오히려 내가 그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시작됐다. 말을 붙이려 노력하고 기분이 상했나 살피고 있었다.


전남친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정적이 길어지면 내가 눈치껏 말을 붙이고 그의 단답을 듣는 식이었다. 사실은 바로 집에 가고 싶었으면서 나를 억눌렀다. 퇴사파티가 뭐라고, 레터링 케이크가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너는 나를 함부로 대하냐고 시위하고 싶었던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희생은 희생일 뿐, 사랑이 아니다.


전남친은 사야할 게 있다며 마트에 들르자고 했다. 차에서 내리고 그는 나를 앞서 혼자 뚜벅뚜벅 걸어갔다. 마치 내가 그를 쫓아다니는 모양새였다. 누군가 볼 때 우리가 연인 사이로 보이기는 할까? 그와 멀어지는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도 계속 멀어졌다.


마트에 간 건 그의 생활용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칫솔이 필요하다고 했다. 매대에는 대량으로 파는 것들밖에 없었다. 전남친 혼자 사는 집이니 그렇게 많이는 필요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낱개로 팔거나 더 적은 묶음은 보이지 않았다. 직원분께 다가가 혹시 더 적은 묶음은 없는지 여쭤봤다. 대답을 듣고 전남친에게 알려주려고 뒤를 돌았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내가 살 것도 아니고 본인을 위해서 직원분께 질문하고 있을 때 그는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다. 계산하러 간다며 내게 말해주는 것도 없이 혼자 쌩하니 가버렸다. 이 순간이 내가 끝의 끝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왜 헤어졌냐고 물을 때 칫솔 때문이라고 답하는 게 참 어이없게 돼버렸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정신이 확 들었다. 내 꼴이 비참하고 많이 우습기도 했다. 잘해주려 계속 노력해도 저 사람은 그냥 나를 더 쉽게 대할 뿐이라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전 22화마음이 끝난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