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끝난 순간

트라우마_22

by 김물꽃

난 믿음을 갈구하는 사람이었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그대로 다 믿어버려서 마음을 다 줘버리고 말았다.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질 때마다 자아가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상처받았던 건 아마도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한 상태로 마음을 줘버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관계에서 내가 우선이라고 마음은 먹지만 정작 관계가 성립되고 나면 매번 그 경계를 지켜내는 법이 없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뭐든 말해달라는 전남친의 말은 내게 그런 틈이었다. 다 믿어버리고 싶었다. 이제 이 사람에게는 모든 걸 말하고 괜찮아지고 싶었다. 고민 속에 혼자 머무는 건 익숙해지는 법이 없었다. 매번 외로웠다.


사실 이때 나는 완전히 자존감이 바닥난 상태였다. 그건 단순히 전남친하고 있었던 수많은 다툼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상처를 받았던 건 같이 일했던 팀원 때문이었다. 가장 아프고 힘든 시기에 왕따처럼 무시당하고 철저히 외면 당해버리자 그 배신감이 너무 컸다. 내 잘못이 아니라 생각해도 잘 극복되지 않았다. 잘 해결해보려고 노력했는데도 이렇게까지 나를 함부로 대하니 많이 답답했고 막막했다.


전남친 역시 그 친구와 갈등을 겪었지만 (사실 그 갈등으로 내 경우가 더 악화됐던 거지만) 둘의 관계는 내 경우와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전남친이 다른 작품의 촬영 지원을 나갔을 때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그 친구 역시 그곳에 제작지원을 나가게 된 거였다. 둘이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그 친구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고 했다. 오해를 풀자고 제안해왔고 그에 응해 둘은 대화를 하고 화해하게 됐다고 내게 전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더 괴로웠다. 왜 그 친구가 내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내겐 인사는커녕 눈을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도대체 왜 나한테는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대하고서 전남친에게는 그렇게 가뿐히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걸까. 내가 너무 쉽게 굴었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 친구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도 힘들었지만 특히 전남친에게서 듣는 건 더 편하지 않았다.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뭐라고 반응할지 모르겠어서 그렇구나 하고 넘겨버렸다.


사실은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건지 알지 못했다. 내 감정인데도 꼭 누구의 허락을 맡아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아 매번 그렇게 인정받을만한 감정을 골라내려고 애썼다.


몸을 다친 채로 작품에서 하차하게 되면서 다른 팀원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어려웠다. 가장 친했던 친구와도 관계가 틀어져버리니 다른 사람들도 친구처럼 생각할까 많이 무서웠다. 그 사람에게서도 상처받는다면 버텨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게 무서워서 마음을 닫아버렸지만 그건 상처를 머금고 있는 것일 뿐, 나를 지켜내는 법은 아니었다.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도망치기 바빴다.


전남친과 만나기로 했던 날을 앞두고 같이 일했던 다른 팀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덥잖은 장난을 담은 연락이었지만 내겐 그 연락이 구원 같았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연락할 수 있구나.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안심시켜주는 연락이었다. 그 팀원에게 너무 고마웠다. 답장으로는 나도 같이 장난치면서 받아쳤지만 그 장난에 다 담기지 못할 정도로 감사했다.


전남친을 만나면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었다. 같이 일했던 제작팀원들이 다 친구처럼 생각할까봐 사실은 많이 무섭고 주눅 들어 있었는데 연락해준 팀원 덕분에 많이 위로됐다고. 힘든 걸 말해달라고 해도 난 정작 힘든 건 혼자 견뎌내고 그 시간이 좀 지나간 뒤에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전남친에게 조금이라도 용기 내서 말해보고 싶었다. 널 아끼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할 수 없다며 내게 필요한 위로를 해줬던 그 순간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데이트하기로 한 곳이 멀어서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꽤 있었다. 전남친과 대화를 이어가다가 그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그 친구 때문에 그동안 너무 힘들었는데 팀원에게서 연락받으니 많이 위로받았다고. 덕분에 많이 힘이 됐다고.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많이 힘들었구나 하는 정도의 위로는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그 위로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전남친은 본인이라면 그 친구와 화해하려고 더 노력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거라 말했다. 솔직히 공감이 안된다고 했다.


뭐라도 위로를 받을 거라 기대했던 내가 우스웠다.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기분은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처음엔 오해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내 상황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내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의 말에 반박하고 내 억울함을 모두 담아 호소하기도 했다. 사실은 나를 위한 사투였다. 내가 잘못된 사람이 아니라고 계속 증명하고 있었다.


뼈가 부러진 채로 하차를 앞두고 있을 때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친구에게도 나는 먼저 다가갔다. 결국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을 때 친구는 무시를 이어갔지만 나는 잘못한 것도 없이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아 화해의 문자를 보냈다. 친구는 그 연락에도 답이 없었다. 뼈가 붙지 않아 추가촬영마저 가지 못하게 됐을 때 다른 스태프가 연락해 그 친구가 했던 내 험담을 전했다. 어떻게 그만두게 되면서 자신한테 미리 말하지 않을 수 있냐는 서운함이라고 했다.


내 연락을 그 친구 본인이 무시한 거였지만, 내가 없는 자리에서 험담을 퍼트리는 친구였지만 그 서운함을 내가 이해할 수 있다 생각했다. 먼저 연락해보라는 스태프의 말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 연락했다. 겨우 연락이 닿고 쫑파티에서 이야기해보자고 마무리가 됐었지만 그 친구는 추가촬영 현장에서 전남친과 싸움을 벌였다. 어렵게 쫑파티에서 그 친구를 만나게 됐을 때 그 친구는 나와 눈을 맞추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온몸이 떨리는 와중에 없는 용기를 모두 짜내 겨우 말을 걸었을 때 그 친구는 할 말이 없다며 너무 쉽게 내 용기를 쳐냈다. 관계가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단념했다. 제작팀끼리 만난 회식자리에서 사람 사이의 예의를 지키고자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그 친구는 역시나 무시를 이어갔고 대놓고 내가 앉은 테이블을 피했다.


전남친은 내가 어디까지 노력하길 바랬던 걸까. 더 노력하라는 말에 난 노력했지만 그걸 끊은 건 그 친구라고 말했다. 전남친은 그래도 자신이라면 더 노력하겠다는 그 바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도대체 그 친구와 전남친이 무슨 관계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두 사람 모두 그들만의 거지 같은 의리로 죄 없는 나만 계속 공격당하고 있었다.


결국은 전남친도 그 친구가 먼저 연락했기 때문에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으면서 내게 하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다르다고 이야기해도 전남친은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너무 공허했다. 도대체 이 이야기를 왜 꺼냈지? 사귀지도 않는 팀원에게서 위로받은 이야기를 꺼내고 정작 사귀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상처를 받게 되는 이 상황이 웃겼다.


자신은 솔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게 위로를 건네는 게 가식 같다고 했다. 그는 뭘 위해서 솔직함을 지키기로 했던 걸까.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달라는 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너무 쉽게 자신이 뱉었던 말을 배신했다. 피를 철철 흘리며 괴로워하는 나보다 자신이 솔직하게 말하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힘든 일을 말하라 해도 공감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을 거면 그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다.


내가 해야 할 말들을 했다. 내 마음을 내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공감해달라는 게 아니라고. 난 단순히 그 친구와의 관계만을 말한 게 아니라 내가 힘들었던 일에 대해서 그에게 꺼내놓은 거라고.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달라 했었으니까 내가 어렵게 그 일을 털어놓으면 적어도 힘들었겠다는 위로는 할 거 같다고. 그건 위선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데에 대한 배려인 거 같다고.


마음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타인보다도 더 멀게 느껴졌다. 끝났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내 마음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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