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필요한 사랑

트라우마_21

by 김물꽃

전남친을 만나기 전에도 나는 내 이야기를 쉽게 꺼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렵게 용기를 냈을 때 오히려 외면받거나 거절당했던 상처들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상대가 물어보지 않는 한 나를 먼저 알려주지 않았다. 물어본다 해도 사실은 털어놓을 자신이 없었다. 정말로 그게 궁금한지 믿을 수 없었고,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좋을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으며 짐을 지우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감정 때문에 버거웠던 적이 있으니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차라리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나는 그 강박에 나를 가둬버렸다.


전남친하고는 쉽게 이별을 생각했지만 고마움을 느꼈던 순간이 있다. 연출학교에 지원하기 전 자소서를 습작할 겸 몇몇 언론사에 지원할 계획이었다. 물론 전남친을 볼 때마다 싸우니 당분간 자소서 준비라는 명목으로 만남을 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진로 고민에 대한 문제도 있었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쉬고 있으니 자꾸 불안했고 뭔가를 증명해내고 싶기만 했다.


자랑이라면 자랑이지만 사실 나는 언론고시를 준비했을 때에 서류전형에서는 웬만해서 탈락해 본 적이 없었다. 제대로 써냈을 때에는 무조건 합격을 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내가 준비만 한다면 서류에서만큼은 합격할 거라 생각했다. 약 2주의 텀으로 두 곳의 자소서 제출이 있었다. 먼저 낸 자소서는 꽤 열심히 다듬어서 제출했다.


두 번째 자소서를 준비해야 하는데 작성하기도 전에 생각이 많았다. 내가 정말 언론사에 입사하고 싶은가? 시험에 합격한다면 그다음 전형도 준비하려는 건가? 애초에 나에 대한 자신이 없으니 그런 생각들에 잠기게 된 거였지만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지금 돌아보면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던 전 팀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내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지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뭐지? 그냥 이렇게 맞지도 않는 남자친구랑 계속 만남을 이어가는 거 말고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없으니 자꾸 주눅이 들었다. 현 상황에 대해서만 자꾸 질문하게 됐다. 결국은 두 번째 자소서 제출을 포기했다. 점점 나에 대한 실망만 늘었다. 역시 난 이런 사람인가 과거의 상처들을 모두 끌어와 나를 공격했다.


그런 상태로 전남친에게는 마감을 잘 끝냈다고 거짓말했다. 사실대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도 한심했고 혼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전남친에게 떠넘기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감정은 억누르고 데이트를 약속했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 그냥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며 노을이 지는 걸 보니 한강에 가고 싶었다.


맥주 몇 캔을 들고 같이 한강을 갔다. 대충 자리 잡고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데 멍하니 강을 보는 걸로도 힐링이 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연출했던 단편영화 이야기도 나왔다. 나는 꽤나 내 글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인데 전남친은 너무 쉽게 나를 평가했다. 전남친은 자소서는커녕 시나리오를 써본 적도 없었다. 친구의 자소서를 고쳐봤다는 게 유일한 자랑이었다. 지가 뭔데 평가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나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져 있어 대충 받아치기만 했다.


전남친은 내가 이뤄온 일들을 아주 쉽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 자신이 없어 나를 깎아내리는 걸로 그 부족함을 채웠던 것 같다. 이미 자신감이 다 벗겨진 나는 그 옆에서 계속 깎여나갔다. 정말 쉬운 사람이라 여겨졌을 거라 생각하면 그때의 내가 조금 안쓰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날 전남친에게 마음을 열게 된 순간이 있었다. 자신에게 더 기대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이야기해달라는 그 말이 내겐 구원 같았다. 전남친이 그 말을 해줬을 때 나는 너무 지쳐있을 때라 딱 필요했던 만큼의 위로를 받은 것 같아 눈물이 고였다. 아직 슬픔을 공유하는 거엔 익숙하지 않아서 어둠 속에서 눈물을 삼켰지만 그 말이 너무 고마웠다. 앞으로는 조금 더 마음을 열어도 되겠다고 믿게 된 순간이었다. 나한텐 그런 사람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힘든 순간에는 늘 혼자였기 때문에 사실 많이 외로웠다. 특히나 이 당시 자존감이 바닥나있으니 누구라도 나를 알아주길 바랬다. 나는 살아오면서 늘 사랑에 목말랐다. 어쩌면 스스로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걸 채워주길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모양과 크기는 오직 본인만이 알 수 있다. 그걸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걸 아주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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