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아닌 내게 질문해야 할 때

트라우마_20

by 김물꽃

연애가 처음이긴 하나 원래도 기념일을 잘 챙기는 편은 아니었다. 더욱이 갈등의 갈등을 쌓아가는 사람이라 그런지 별로 기대되지 않기도 했다. 애초에 1주년이 아니고 100일을 챙긴다는 것도 그 사람이 원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기념일이었다.


그렇다한들 나름의 계획들을 세우고 기념일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이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여행에서 그가 저지른 잘못이었지만 그 여파로 내가 감당해야 했던 일들이 남아있었다. 그 일을 혼자서 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 겪게 될 불편함이 더 싫었다.


상황이 여유롭게 흘러가진 않았다. 100일 당일이었지만 새벽부터 일어나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문제를 알아보려 조급해했다. 다행히 만나기 직전에는 일단 해결할 수 있어 마음을 놓았지만 진이 빠져버렸다. 점점 이별을 예감하는 거 같았다. 그를 만나 사진도 찍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그가 하고 싶어 하던 것도 같이 즐겼다. 그가 원했던 걸 다 들어주면 헤어져도 아쉬움이 남진 않겠다는 생각이었던 거 같다.


그래도 그날 밤은 정말 간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아마 그와 헤어지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래도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전의 포스팅에도 말했듯 그 믿음은 근거가 없다. 그저 내가 믿기로 결심했을 뿐이지 정말로 그가 그런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념일이 지나고부터 내 생활을 늘리기 시작했다. 일을 쉬고 있어서 그런지 그와의 문제에 더 집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부터 학교에 들어갈 생각을 했다. 영화 연출을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전에 자기소개서를 연습할 겸 언론고시 공채에 시험 삼아 도전할 생각이었다. 자기소개서를 준비하며 여유를 가지며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도 나도 그 당시 진로 고민도 있었어서 이것저것 새로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그 사람도 일을 쉬면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려 했었기 때문에 각자 해야 할 일에 집중하다가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정말 지겹기도 하지만 우린 그렇게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싸웠다.


어떻게 보면 여행에서 싸웠던 일의 연장선이었다. 난 아직 그가 했던 잘못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람 때문에 해결해야 할 실질적인 일이 있었다. 아무래도 고민은 나누지 못한 상태로 혼자 감당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원망이 쌓였다. 누르고 누르다 결국은 그 감정이 터져버렸다.


통화로만 이어가던 이야기에 서로의 감정이 격해졌다. 결국 나는 모든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털어놓기엔 다시 싸울 거 같고 혼자 감당하기엔 억울하기도 했다며 내 감정을 쏟아냈다. 한편으론 이번엔 그가 내 감정을 받아주길 바랬던 거 같다. 어쨌든 잘못의 원인이 명백히 그에게 있으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는 내 예상에 들어맞던 적이 없었다. 왜 자신을 믿지 못하냐며 소리쳤다. 줄이 하나 끊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뢰를 깨버린 상대가 왜 자신을 믿지 못하냐며 소리 지를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그 태도에 떨어질 정도 없었지만 계속 실망만 더해갔다. 어찌저찌 다시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며 메꾸긴 했지만 정말 많이 지쳐버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헤어지는 걸 상상하지만 정작 이별을 말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답답했다. 내 자존감이 바닥난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탓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나를 믿지 못하는 나였다. 내가 당장에 느끼는 감정들을 나는 무시했다.


연애가 처음이라 해도 분명히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 검사받으며 이 정도는 내가 이해해도 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정작 내가 괜찮지 않았는데도 다른 사람이 전남친을 이해한다고 하면 그럴 수 있다고 넘기려 했다. 뒤늦게 알게 됐지만 그때 정말 질문해야 했던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내가 괜찮은지 더 살폈어야 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누군가와 연애하기 전에는 남자친구의 흉을 보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친구들이 이해가지 않았다. 나는 상처받는 걸 많이 무서워하기 때문에 나를 함부로 대한다고 생각하면 당장에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헤집어놓는 누군가를 만나고 나서야 그 관계가 얼마나 끊어내기 힘든 건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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