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_19
믿음이란 선택의 문제라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내가 믿기로 결정하면 어쩔 수 없게 그 모든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전남친의 미안하다는 말을, 노력하겠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믿어보고 싶었다. 우리가 달라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날은 여행에서의 두 번째 날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가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던 여행지 곳곳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나는 나가서 돌아다니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걱정된 건지 어떤 의도였는지 그는 그냥 숙소에 머물자고 이야기했다. 그토록 기대했던 여행을 내가 망쳤다는 생각은 떨치기가 힘들었다. 툭하면 터져 나오는 눈물이 막기도 어려웠다. 그와 함께 있으면 우는 일이 많아졌다.
다음날이 되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나는 계속 알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진 상태였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기 때문에 들르자고 이야기했다. 내 기분에만 빠져있었지만 그의 기분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좀 풀어졌다 생각했는지 그는 또다시 쉽게 자기감정대로 행동했지만 나는 계속 노력했다. 그의 기분에 맞춰주려 애썼다.
기념품 샵에 들러 소소하게 커플 아이템을 고르기도 하고 포토부스에 들러 사진도 찍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마무리 아닌가 생각했다. 난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의 불편함을 자초한다. 사실은 온통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마지막 날을 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행복으로 보일 만한 상황들을 만들어냈고 돌아가는 길에도 밝은 척하며 기분을 띄웠다.
집에 도착하자 머리가 멍했다. 스위치가 꺼진 거 같았다. 그에 대한 생각도 나에 대한 생각도 모두 꺼져버렸다.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 계속 질문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깨진 신뢰를 극복해 본 적이 없다 보니 너무 어려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아마 그때부터 어떤 면으로는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감정보다 내 감정을 더 챙기자는 생각이었다. 제대로 표현하자. 싫은 것은 정확히 거절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는 늘 나를 순하고 선한 사람으로 환상을 갖고 바라봤기 때문에 그 평가를 지키고 싶어 내가 더 매몰차지 못하기도 했다. 그 환상은 이제 깨버리자고 생각했다.
당장은 좀 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며 좀 시간을 갖다가 만나자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됐을 때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실은 불편한 마음이 가득했다. 오늘도 내가 상처받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그를 만나는 동안은 늘 그런 불안함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예측할 수 없는 반응들은 내게 공포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나와의 약속은 잊었다는 듯 너무 쉽게 행동했다. 나는 이전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고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정확히 이야기했다. 분명하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에게 상처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기에 공격적인 언행이 아닌 사실 그대로만 이성적으로 전달하려 많이 애썼다. 하지만 그는 그 말들에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그가 뱉어버린 말들은 정제되지 않고 늘 날것의 형태였다.
나에게 어떻게 들릴지 배려하지 않은 그 언행은 실망하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노력하겠다는 말을 기억했다. 믿기로 했으니 믿어보자. 전남친과 나는 정확히 기간을 두고 약속했었다. 한 달. 한 달을 노력해보자. 나 역시 그 말을 믿고 한 달만큼은 그도 믿고 나도 믿어보기로 노력한 것이다. 그의 그런 태도는 익숙한 것이지만 앞으로 달라질 거라 믿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100일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