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싸우는 법

트라우마_18

by 김물꽃

다음날이 되었다고 상황이 달라질 리 없었다. 오히려 더 악화된 것만 같았다. 멈출 틈도 없이 눈물이 계속 났다. 전의 포스팅에서 반복적으로 말했지만 난 내 감정을 잘 알아채지 못한다. 직면하는 순간을 늘 겁냈기 때문에 슬픔이라고 뭉뚱그릴 뿐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아마도 그때 느낀 감정은 그에 대한 실망, 그걸 넘어서는 나에 대한 실망이었던 것 같다. 내가 더 똑 부러졌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가 함부로 행동하게 만든 건 모두 내 잘못이 아닐까 생각했다. 상대방의 확실한 잘못에도 자책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전남친은 내 눈치를 봤지만 나에게 정말 미안해했다거나 사과하려는 모습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저 지금 이 불편한 상황을 빨리 마무리 해버리고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어 보였다. 이 기분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내가 더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하고 있을 때면 나는 늘 답답하고 바보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론 그와 내가 닮아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 역시 갈등을 견디지 못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그 불편함을 끝내버리고 싶어 상대방을 몰아가는 편이라면 나는 내가 모든 걸 감당하는 편이었다. 다행히 이때만큼은 내가 받은 상처에 집중했다. 그걸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무기력해진 상태라 괜찮은 척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와 화해하고 싶지도,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여행지를 돌아다닐 자신도 없었다.


전남친은 잠시 자리를 비워주겠다며 숙소를 나갔다. 무기력과 슬픔이 나를 짓눌렀다. 도대체 여기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답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누군가 나 대신 어떻게 하면 된다고 결정 내려주길 바랬다.


비단 연인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물론 이게 첫 연애였지만) 인간관계에서 나는 보통 최선의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미련할 정도로 참기도 하고 온갖 정을 다 주기 때문에 돌아설 때는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이게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을 잃는 게 나한텐 많이 두렵고 아픈 일이기 때문에 적어도 내가 노력해보지 않고 끝나버리는 경우는 피하고자 그런 식으로 관계를 지켜나갔다.


전남친하고의 관계에서도 내가 최선을 다한건지 질문했다. 이대로 헤어져도 아쉬움이 남지 않을까. 만약 그가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게 정말로 내 태도의 문제였다면 다시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꼭 그하고의 관계를 지켜가는 게 목적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른 사랑을 하게 될 나를 위해서 태도를 확실하게 바꿔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해도 당장은 전남친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몸 안의 내장이 모두 뒤엉켜 꼬인 느낌이었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돌아갈 버스를 알아보고 짐을 쌌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떠나면 혼자 남을 그가 걱정됐다. 내가 가버린 뒤 혼자서 짐을 챙기고 이 공간을 정리하는 모습이 너무 슬펐다.


미련하게도 나는 내 짐을 챙기면서 그의 짐까지 챙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가 돌아왔다. 손에는 내가 마실 카모마일 차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짐을 챙기는 걸 보고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나는 생각할 시간 좀 가져야겠다고 말했다. 돌아간다고 하자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대로 떠나려는데 그가 붙잡았다. 그는 내가 이대로 가면 못 볼 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시간을 갖자는 말이었지 당장에 그를 보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와 제대로 이야기해보자고 마음을 바꿨다. 이야기를 해보고 결정하자. 그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한다면 한 번은 믿어보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하기 위해 정말 노력했다. 내가 다투는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를 썼다. 공격적인 말보단 내가 느끼는 감정과 갖고 있는 생각들을 오해 없이 전달하는 거에 집중했다.


아마도 나는 스물아홉에야 다른 누군가와 제대로 싸우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못했다. 대화를 할수록 정말 이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될 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보단 우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에 집중했다. 이 일이 왜 이렇게까지 나한테 상처가 되는 건지 모든 걸 털어놨다. 그가 전부 이해하는 거 같진 않았지만 내게 사과했다. 노력하겠다며 바뀔 기회를 달라고 했다.


전부 오답만 늘어놓았지만 적어도 그 모습만은 진심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웹툰에서 상처받은 소녀 소년이 등장한다. 혼자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가진 두 주인공은 둘이 함께 이 아픔을 뛰어넘어보자고 이야기한다. 나도 그런 사랑이 하고 싶었다. 전남친과 함께 각자가 지닌 상처를 극복해보고 싶었다. 혼자라면 어렵지만 함께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늘 나를 구해줄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도 그런 의지를 갖고 있을 때 가능하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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