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가 깨져버린 밤

트라우마_17

by 김물꽃

깁스도 풀었지만 같이 일했던 팀원들과 따로 회포를 풀 일도 없었으니 내 시간은 붕 떠있었다. 일하느라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하나씩 만나기 시작했다. 연애를 하면 얼굴이 핀다고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근심 있냐고 걱정했다. 일하면서 있었던 일, 전남친과 싸우는 일들을 털어놔도 후련하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 것들과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내 친구가 나와 같은 고민을 털어놓는다면 당장에 헤어지라고 말할 걸 스스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연애를 이어갔다. 정말이지 매번 사랑하려 노력했다.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노래가 있지만 나는 이 관계를 지켜내보고 싶었다. 너무 힘들었던 순간 전남친이 나를 붙잡아줬던 그 순간이 나한테는 너무 강력했다. 최선의 최선을 다해 사랑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게 정말 사랑이라 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전남친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여행을 가게 됐다. 사실은 그다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여행을 가서 뭘 할지 설레는 마음보다는 숙제를 끝내야 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일단 이걸 해치워버리면 그때는 한동안은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 조금 쉬어도 되겠다는 그런 생각이었다.


여행을 떠난 첫날, 나름대로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냈다. 평범한 연인의 모습이었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데이트를 하고 있으니 크게 부딪힐 일도 없었다. 그렇게 무난히 지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첫날마저도 조용히 지나가질 못했다.


나는 술이 취하면 좀 풀어지는 편이다. 평소엔 감정을 억누르는 편이지만 술기운이 오르면 많이 웃고 표현도 솔직해지는 편이다. 사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술에 취한다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꼭 마셔야 한다거나 기분이 너무 좋아서 취할 걸 감안하고 마시지 않는 이상 절제해서 마시는 편이다. 최대한 정신 똑바로 차리는 편이라 잘 취하지도 않지만.


하지만 전남친은 그런 풀어진 모습을 좋아했다. 뭐 그걸 좋아할 수야 있지만 내가 싫었던 건 둘이 술 마시는 때가 있을 때마다 왜 그만 마시냐고 서운해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나만큼이나 다른 사람이 내 앞에서 절제하지 못하고 술 취하는 모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두 번 실수는 그러려니 해도 술에 마실 때마다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면 솔직히 신뢰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귀기 전, 친구들과 모여 술을 마셨을 때 나는 그 사실들을 말했었다. 전남친 역시 자신도 취할 때까지 마시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나에게 잘 보이려는 거짓말이었을 수 있지만 난 그 말을 믿었었다. 좀 편해진 후에 전남친은 주정 부리는 일이 많아졌다. 술에 취해 감정을 쏟아내는 전화들을 자주 했고 다음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못했다.


속상하면 그걸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 했다. 술에 취해선 통화로 내게 서운하다 더 사랑해달라 투정부리는 이야기들은 내 사랑을 더 키울 리 없었다. 내가 그를 속상하게 만들어서 결국 나 때문에 술을 마신다는 그 변명들을 내게 쏟아냈다. 워낙 자존감이 떨어져 판단이 잘 안 서던 때라 전남친의 그 거지 같은 발언들까지 모두 믿어버렸다. 내가 그를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을 거라 스스로 자만하기도 했다.


여행도 왔으니 사실 그렇게 강요하지 않았으면 나도 기분 좋게 더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취하지 않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야말로 술맛이 떨어졌다. 매번 그렇게 삐진 척을 할 때는 대충 달래주고 넘어갔지만 솔직히 나도 짜증이 났다. 그만하라고 정색하고 말하니 일단은 미안하다고 넘어갔지만 입맛도 다 사라졌다.


누군가를 만나 변화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 때 나는 그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는데 같이 있으면서 변해갈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대되기는커녕 걱정이 됐다. 이 사람과 있으면 내가 망가질 수도 있겠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밤, 그 사람은 신뢰를 깨버리는 행동을 했다.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내 가치관을 부숴버리는 행동을 했다. 나야 애당초 맨 정신이었지만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믿음마저도 깨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지적했지만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밤이 늦어서 당장 집에 가기도 어려웠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지만 분노와 실망에 잠겨 잠도 오지 않았다. 계획했던 여행은 아직 이틀이나 남은 상태였다. 난 정말 이 사람한테 함부로 대해지고 있다는 상처도 컸지만 난 그때 정말 나를 돌보지 못했다.


어쩌면 스스로를 아껴주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티가 나는 거라 생각했다. 그걸 알아채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대하지 않는 만큼 그 사람도 나를 그 정도로만 대해도 된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상처가 깊었지만 그보다는 그 사람이 그토록 원하던 이 여행을 망쳐버렸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잘못하지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껴버리는 게 끔찍한 내 패턴이라는 건 아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때는 나도 그 불편한 분위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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