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트라우마_27

by 김물꽃

연애를 시작할 무렵 전남친과 친했던 스태프가 사귄다는 소식을 듣곤 내게 축하를 건넨 적이 있다. 전남친이 말한 건지 그분은 내가 연애가 처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잘 만나보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전남친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분한테 알려달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애가 괜찮은 사람인지 어떤지 알고 싶었다.


좋은 말을 해준다거나 평소 습관정도는 알려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분은 그건 내가 직접 알아가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말했다. 연애를 할 때 다른 사람에게 어떤 지 물어보는 것보다 스스로 파악해가는 게 두 사람에게 더 나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 방식이 헤어질 때 더 중요하게 적용된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연애를 하는 동안 전남친의 행동을 나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지 알고 싶어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물어볼 때마다 속이 후련해진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만나는 동안에는 내 얼굴에 침 뱉는 격이니 어느 정도 필터링을 거쳐 이야기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친구가 어떻게 말하든간에 전남친을 경험한 건 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연애박사가 됐든 간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주변에 털어놓지도 않고 혼자 끙끙 앓긴 했었다.


하지만 헤어질 때만큼은 정말로 온전히 내 감정과 생각에 집중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몸과 마음을 충분히 회복해야 하기도 했다. 우선은 바로 요가를 등록했다. 일하느라 오른쪽 발가락이 부러지고는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체력이 매번 바닥나있으니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또, 심적으로도 내 내면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일상에서는 굳이 전남친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뭐 자연스레 떠오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부러 생각을 안 하려고 누른다거나 매일같이 전남친 생각만 한다거나 하지 않고 하루하루에 집중한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연히 그런 생각에만 쏠릴 테니 관심을 돌릴 것들을 끊임없이 찾았다. 내 경우는 주로 드라마를 찾아보곤 했는데 그때 도움이 된 건 유미의 세포들과 스물다섯, 스물하나였다.


친구는 그럴 때 사랑 이야기 보면 더 괴롭지 않냐고 물었지만 애초에 내가 찾은 것들이 마냥 행복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서 좋았다. 특히 유미의 세포들은 웹툰으로 미리 봤었는데 그때도 사랑보다는 유미가 성장해가는 이야기라서 인상 깊었던 기억이 있었다. 유미의 세포들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장면, 명대사로 꼽히는 부분이 있는데 이 이야기에 남자 주인공은 따로 없다고, 주인공은 유미 하나뿐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선 내가 위로받은 것처럼 펑펑 울기도 했다.


그리고 환승연애 시리즈도 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아니 도대체 헤어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연애 프로그램을 한다는 야만적인 생각은 누가 한거지 싶어 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그 프로그램으로 떠들어대도 궁금하지가 않았다.


막상 내가 헤어질 위기에 처해있으니 환승연애는 예능이 아니라 다큐였다는 걸 알게 됐다. 여러 사람들의 이별과 갈등을 보면서 스스로도 많이 반성했다. 관찰자의 입장으로 지켜보면서 아닌 관계를 계속 붙잡고 있는 건 힘든 일이라는 걸 배웠고, 또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것들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아무래도 내가 연애뿐만 아니라 일적으로도 많이 상처를 받은 상태였는데 그 시기를 위로받는 작품이었다. 특히 주인공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식당에서 만난 할아버지께서 “참 별 일이 다 일어나지?” 하며 위로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말이 꼭 내가 듣고 싶었던 말처럼 들려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거지 하며 자책하기도 했지만 그걸 다시 딛고 일어서는 것도 나에게 달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픔이 있더라도 스스로 잘 위로하고 힘을 낼 수 있을 때 다시 일어나면 되겠다는 의지도 다질 수 있었다.


아마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끝까지 잘 마무리하길 바라는 마음에 결말에서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도 많았던 거 같은데 난 충분히 아름다운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머물지 않아도 각자의 방향으로 잘 나아간다면 그건 그거대로 행복한 결말이 된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뭐 이런저런 프로그램도 찾아보고 나에게도 집중했다. 정말 가끔 너무 고민되는 순간에 내가 하는 방법이 있는데 해야 하는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표처럼 나눠 적는 거다. 잠정적 이별의 순간이었으니 나는 계속 만나는 경우와 헤어지는 경우를 둘로 나눠 그 이유를 모조리 적었다. 아직은 내가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부터 내가 아깝다는 아주 가지 각색의 이유들이 있었다.


양적으로는 확실히 이별이 이유가 많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유가 많다고 해도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이 방법으론 내가 이유가 많다고 해도 아직 놓지 못할 정도로 망설이고 있다는 것만 알게 됐다.


이런저런 방법을 거치면서, 그리고 특히 환승연애를 보면서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결정이 어려운 걸 보면 지독함을 맛보지 못해서 그런 거라며 끝의 끝까지 가면 손을 놓게 될 거라 생각했다. 전남친에게 주말에 볼 수 있냐고 연락했다.


참 돌아보면 헤어지려면 또 헤어지게 되어있구나 싶었다. 사실은 내가 연락한 것처럼 주말에 만났다면 아마 헤어지지 못하겠다고 말했을 것 같다. 하지만 전남친은 본가에 내려가서 주말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주말이 지나고 평일에 만나자고 약속을 미루면서 나는 며칠 동안 더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그 사이 첫 상담이 시작됐고 주말이 지나 전남친을 만났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결정을 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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