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결심할 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트라우마_26

by 김물꽃

첫 상담을 받기 전의 상황이다. 전남친에게 시간을 갖자며 이야기하고 헤어진 다음날 많은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분명 좋았던 때도 있었고 나는 더 노력해보고 싶었다. 나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관계로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무너지고 나니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한테 함부로 대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내가 뭐가 되고 안되는지를 명확히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싸움을 피하고 싶어 모든 무례함을 내 선에서 결국 이해하려고만 하니 나를 지키지도 못하고 붕괴된 것 같았다.


동시에 전남친이 내 신뢰를 깨버리는 순간이 너무 쌓여있었고 새로운 상황에서도 나는 그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처럼 관계만 지키자고 갈등이 있을 때 대충 넘어가는 식으로는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당시 나는 판단력을 모조리 상실한 상태였다. 본능적인 어딘가에선 분명 그와 헤어지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뭐가 더 나은 선택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내가 기분이 나쁠 때 전남친에게 화를 내도 되는 건지 의심할 만큼 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혼자서 생각해볼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또, 이전의 포스팅에서야 그 순간 모든 걸 깨달았던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난 내 잘못도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건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시간을 갖고서 내가 전남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우리 관계가 좋아질지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딱 지금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직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시간을 갖자고는 했지만 정확히 얼마만큼의 시간인지는 서로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나라는 사람이 충분히 회복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2주라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의 입장이 뭐가 됐든 무작정 기다리게 할 생각도 없었고 일단 내 입장은 이렇다고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어 그에게 카톡을 남겼다.


우선 내가 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는지 이유를 말했다. 친구 때문에 내가 너무 힘들었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더 노력했어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 관계가 깨진 게 내 탓이라는 말처럼 들려서 속상했다고. 전남친 입장에서는 해결책을 말했을지 모르지만 전에 너무 위로받았던 기억이 있다 보니 나는 이번에도 그걸 기대했던 거 같다고.


그리고 지금 내 상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일하면서 힘들었던 게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새로 일을 준비하면서 컨디션이 안좋았다고. 내 상태 때문에 전남친의 이야기를 더 과민하게 받아들인 거 같다고. 요즘 나를 돌아봤을 때 전남친이 말하는 거에 건강하지 못하게 반응하고 있는 걸 깨달았다고.


그러다보니 지금은 전남친에게 뭔가를 바꾸라고 하기보다 내가 달라질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장 관계를 그만두거나 갈등을 가볍게 넘기려는 게 아니다보니 건강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이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적어도 2주는 걸릴 거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는 기다리는 게 힘들 걸 알지만 일단 내가 회복해야 우리가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다며 시간을 갖자는 것도 그 시간까지도 내 맘대로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부탁한다고 전했다.


답장을 기대하고 연락한 건 아니었지만 그는 내 카톡을 읽고 아무 대답도 주지 않았다. 시간을 갖자는 말을 착실히 행하고 있는 건가 싶으면서, 꼭 이럴 때만 원칙대로 행동하는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로 뭔가 반응을 기다리고 보낸 연락은 아니라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나대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쨌든 2주라는 시간이 생겼으니 차분히 우리 관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생각할수록 이 관계를 끝내는 게 맞았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면서 헤어지자 말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다 한 4일쯤 지났을 때 불쑥 전남친에게서 내가 보냈던 연락에 대한 답장이 왔다. 좀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 타이밍은 묻고 넘어갈 만큼 내가 듣고 싶었던 내용이 담겨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내 입장을 기다려주겠다는, 내가 언제나 그에게서 바라던 태도였다.


그 연락을 보면서 이렇게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싶어 한편으로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런 말을 할 줄 알았으면서 도대체 나한테 왜 그렇게 함부로 대한 걸까 싶어 밉기도 했다. 싸우고서만 잘해주는 게 아니라 애초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싶었다. 결국 내 다짐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헤어지자고 다짐했지만 연락 한 번에 다시 흔들리는 내가 너무 싫었다. 2주라는 시간이 되기 전에 그에게 연락하려고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을 갖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은 그 사람이 좋지 않은 사람인 걸 알아도 지금 끊어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흔들리는 마음에 전남친을 다시 만난다고 해도 앞으로의 미래가 두려웠다. 그 사람을 감당할 수 없었다.


헤어져야겠다면서 헤어지지 못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왜 저걸 끊어내지 못하지 하면서 답답해했는데 딱 내가 그 꼴이었다. 아닌 걸 알아도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건 모두 내가 나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 조급해할 건 없다. 충분한 시간을 들이면 내가 원하는 선택은 자연히 떠오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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