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감정에 잠시 머무르기

트라우마_28

by 김물꽃

첫 상담은 늘 그렇듯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횡설수설 쏟아냈다. 일단은 남자친구와 시간을 갖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외로움 때문에 확신 없이 시작했던 첫 만남부터 신뢰감이 바닥나버렸던 여행날, 그 이후 실망스러운 대처들.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하려 했지만 이야기할수록 주관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선생님께 말하면서도 조금 걱정이 됐다. 역시 내가 문제였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겁이 났다. 본인이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비난은 피하고 싶어 하는 게 모순적이었지만 그게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전남친이 나쁜 사람이라는 비난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어떤 반응을 바라는 지도 정리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내가 예상했던 그 모든 반응에서 빗나갔다. 이야기하는 대로 그럴 수 있겠다며 나를 이해해줬다. 선생님이 들어도 전남친의 행동들은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지 않은 것 같다고, 내가 충분히 서운하게 느꼈을 만하다고. 그 말이 내게 너무 필요했다. 그 모든 순간에 내가 잘못된 게 아니었다는 누군가의 인정이 나로 돌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화내도 되는 걸까, 속상해도 되는 걸까 스스로 수많은 불안을 안고 질문했던 그 상황들이 모두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다. 덤덤히 이야기를 하던 내가 눈물을 쏟아냈다.


전의 포스팅에서도 한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내 감정을 잘 캐치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속상함, 분노, 불안함 등의 감정을 느끼는 걸 무서워하다 보니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모호한 형태로 처리해버리고 억눌러버렸다. 5년 전 처음 상담받았을 때 선생님께서 그 점을 알려주셨고 여전히 나는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상담을 받으며 일화를 풀어낼 때마다 선생님은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항상 회피해왔던 나를 눈치채고 제대로 나아가기 위해 감정들을 직면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설명하는 게 어려웠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서는 밤을 새우며 고민했어도 정작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에 대해서는 시간을 할애한 적이 없었다. 완전히 부서졌던 나는 그 상담실에서 다시 차곡차곡 나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지 않는 전남친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부모님의 불화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내가 연애를 하게 된다면 사랑받고 사랑하며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다. 아무리 나쁜 관계였어도 그걸 깨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잘 참고 견디면 서로 좋은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는 거 같지 않았다.


그런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전남친을 미워했던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나를 미워했다. 이런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미련스러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똑똑한 척해도 실상은 자신의 일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내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가 제일 싫었다.


습관처럼 나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상황 설명으로만 숨 가쁘게 쏟아냈다. 지금 내가 떠오르는 수많은 분노를 모두 떨쳐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중간중간 나를 멈추게 만들었다. 호흡과 감정이 거칠어졌을 때 잠시 이야기를 중단하고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머물러보라고 했다.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도록 했다.


이 방법은 20회의 상담 내내 사용된 방법이었다. 하지만 첫 상담 때만 해도 나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잠시 말을 멈추고 그때의 상황에 머무르는 게 무서웠다. 그때와 같은 분노, 불안함, 두려움에 갇히는 느낌이 들었다. 외면하고 싶고 무시하고 싶었다. 빨리 모든 걸 말해버리고 털어버리고 싶었다. 말이 아닌 가슴으로 그때를 제대로 느껴야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오랜 연습을 거쳐서야 배울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나도 그대로 받아줬다. 당장 해내지 못해도 그 시간을 같이 기다려주셨다. 상담실에서는 내가 나로 있을 수 있었다. 불안한 모습도, 걱정이 많은 모습도 모두 나였다. 내가 쏟아내는 그 어떤 이야기에도 틀린 순간은 없었다. 정작 나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느꼈던 감정까지도 모두 불확실하게 만들었지만 상담 선생님은 그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거라며 나를 지지했다.


그동안 혼자 쌓아왔던 감정을 터트리자 무너질 거 같았던 걱정과는 달리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본질적인 문제가 당장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낭떠러지로 굴러가지는 않겠다는 안정감이 생겼다. 5년 전 상담실을 찾았을 때 느꼈던 안도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매주 상담을 받는 동안에는 내가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상담이 끝나고 전남친과의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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