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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Sep 11. 2023

여름휴가_01

제대로 쉬기 위해선 하던 일을 모두 멈춰야 한다.

휴가를 계획한 건 완전히 지쳐버렸기 때문이었다. 항상 바쁘게만 움직인 건 아니었지만 8월까지 끊임없이 달렸다. 주말엔 휴식을 취하자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느새부터인가 주말마저도 쉬는 일정이 자리 잡혔다. 일주일마다 방청소를 하고, 브런치 연재를 미리 구상해두고, 1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돌아온다. 정해진 루틴을 반복하니 이게 정말 쉬는 거 같지도 않아져버렸다. 쉬어야 하기 때문에 쉬는 느낌이었다.


일상과 전혀 다른 먼 곳으로 잠시 떠나 있고 싶었다. 지금의 생활을 전부 그만둘 필요가 있었다. 글을 쓰는 것도 정말 일이 되어 계속 이어가다보니 하루에 써낼 분량을 지키기만 할 뿐 이게 정말 필요한 이야기로 흘러가는지 확신이 없었다. 점점 내 이야기가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가까이에 붙어있으니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거 같아 겁도 났다.


휴가를 떠날 수 있는 가장 적정한 일주일을 잡아 여행을 계획했다. 여행지는 내가 가장 자주 갔고 익숙한 강릉. 버스로도 빠르게 다녀올 수 있다는 거, 뚜벅이로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쉬러 간다 해도 나는 은연중에 늘 효율적인 여행을 감안하게 됐다. 잠시 떠나는 동안 꼭 제대로 쉬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시작부터 계획엔 차질이 생겼다. 바로 당장 월요일부터 떠날 생각이었지만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사라지지 않았다. 해변에 가서 비키니도 입고 따뜻한 (다소 뜨겁더라도) 태양을 내리쬐며 이곳저곳을 걸어 다닐 생각이었다. 흐리기만 해도 아쉬운데 비까지 온다면 숙소에만 틀어박혀있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계획을 바꾸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내가 바꿀 수도 없는 날씨를 두고 혼자 스트레스를 받았다. 태풍이 온다면 태풍이 온다고 생각하고 내 계획을 수정하는 게 효율적인 일인데도 내 계획은 그대로 두면서 태풍이 저절로 사라지길 바랬다. 바보 같은 바람인데도 주말 동안 계속 날씨 예보를 찾아보며 마음을 졸였다. 결국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변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고 날이 개면 떠나는 걸로 계획을 바꿨다.


막상 월요일이 되니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냥 그대로 떠났으면 오히려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남았다. 하지만 어찌 됐건 월요일부터 휴가는 시작됐다. 아쉬움 때문에 휴가를 망치느니 날씨라는 변수는 제쳐두고 직접 가서 확인하자 마음먹었다.


자체 휴가를 시작하면서 한 가지 다짐한 건 하루의 루틴을 모두 멈추는 것이었다. 사실 휴가를 떠나서도 매일 글을 쓰고, 영어공부를 하고, 뉴스를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시간적으로 많이 소요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빠듯하게 일정을 맞춘다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박적인 규칙을 지켜야한다면 내가 제대로 쉬지 못할 걸 알았다. 억지로라도 끊어줄 시간이 됐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이 루틴들을 잠시라도 멈추면 내가 완전히 잘못될 거 같은 불안함도 들었다. 왠지 글을 쓰던 실력이 바닥으로 꺼질 거 같고 영어 문장을 외우던 것도 다 까먹을 거 같고 사회 돌아가는 소식을 모두 놓칠 거 같았다. 월요일, 이 모든 걸 그만뒀을 때 처음엔 나쁜 짓을 하는 기분도 들어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막상 저녁이 되자 후련했다. 크게 내 삶이 망가진 거 같지도 않았다. 그냥 나는 푹 쉬었을 뿐이다. 


평소에 휴식을 취했던 주말보다도 더 편하게 하루를 보낸 거 같다. 매일을 뭔가 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다보니 주말이라도 은연중에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 했다. 하지만 월요일 휴가부터는 시간을 낭비해도 좋다는, 아니 실컷 낭비하자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봤던 드라마를 또 보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딴짓만 하고 하루를 낭비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내일이 기다려졌다.


날씨를 보니 태풍 소식은 계속 남아있을 거 같았다. 더 이상 날씨에 휘둘리기보다 그냥 내 계획을 세우고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그 휴가를 즐기자고 생각을 바꿨다. 화요일에 짐을 싸고 수요일부터 강릉으로 떠날 계획을 새로 세웠다. 날씨가 추울지, 더울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다. 한편으론 덥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얇은 옷들로만 가방을 채웠다.


2박 3일로 떠나는 여행은 정말 오랜만이라 설레기도 하지만 떨리기도 했다. 꽤 많은 짐을 챙기다보니 괜히 오래 머물기로 결심했나 싶어 지금이라도 일정을 줄일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여행은 아직 떠나지도 않았으니 알 수 없었다. 막상 갔을 때 더 좋아서 머물고 싶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든 일은 그곳에 가서 직접 겪어보고 결정하자고 생각했다. 


여행 가는 당일 새벽까지도 잠에 들지 못했다. 다가오는 버스 시간을 보면서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집에서 쉴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젠 나라는 사람을 안다. 실체도 없는 불안함때문에 여행을 취소해버리면 하지도 않고 포기해버린 나에게 더 실망할 게 뻔했다. 그 생각으로 나를 달래며 3시간 정도 수면을 취했다. 


버스를 타러 갈 때까지도 숙소는 예약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어나서 혹시라도 컨디션이 나쁘면, 도착해서 날씨가 안 좋으면 언제라도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강릉으로 떠날 때 이번 여행이 재미있을 거란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름휴가는 여태껏 해왔던 여행 중 손에 꼽을 만큼 아주 완벽하고 마음에 꼭 드는 여행이었다.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 더 재미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 하던 일을 멈춘다는 건 내가 망가진다는 게 아니라 휴식을 의미한다는 걸 오랜만에 다시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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