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물꽃 Sep 18. 2023

여름휴가_02

아주 완벽한 여름

그야말로 완벽한 휴가였다. 계획대로 흘러간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이벤트가 가득했던 것도 아니다. 결국 완벽이란 건 나에게 얼마나 맞추냐에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아주 솔직하고 만족스러운 여름이었다.


난 기질적으로 모순이 가득한 사람이다. 심리 상담을 받을 때 기질 검사를 한 적이 있다. 몇몇 개의 결과가 나오지만 그중 인상 깊었던 건 자극 추구와 위험 회피 성향이 동시에 높게 나왔다는 점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걸 즐기지만 그런 일을 할 때마다 불안해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번 휴가 계획이 꼭 그랬다. 사실 강릉 여행이라고 한다면 성인이 되고서는 시간이 될 때마다 찾았던 곳이라 새로울 게 없었다. 아니, 언제 어떤 마음으로 가는지는 매번 달랐지만 찾는 곳이 매번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주로 바다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으니 바다를 보고, 근처의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좋아하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면 그게 끝이었다. 갈 때마다 좋았으니 새로운 곳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이번 여행은 달랐다. 빠르게 휴식을 취하겠다는 생각에 당일치기 여행을 주로 했으니 2박 3일 여행을 계획한 것부터 평소와는 다른 결이었다. 그래서인지 스멀스멀 불안함이 밀려들었다. 강릉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야 숙소를 예약했다. 


생각을 바꾸지 못하게 2박 3일로 당장 결제해버렸다. 나는 돈을 써서 신청하면 웬만해서 취소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기로 해놓고 하지 않는 건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다르겠지만 대개 나는 불안함때문에 두려워하는 건데 등록해놓고 막상 해보면 좋아한다는 것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강릉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날씨에서는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배낭에는 당장에라도 꺼내 쓸 수 있게 우산을 챙겼다. 하지만 터미널에 도착해서 식당으로 이동하는데 비가 오기는커녕 태양이 내리쬐느라 지금 바로 바다에 뛰어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날씨였다. 얇은 옷들로만 챙겨온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계획은 그렇게 바뀌어나갔다. 첫날은 맛있는 거 먹고 책도 읽으면서 주변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밥을 먹으면서 뜨거운 태양을 그대로 맞고 있으니 내일이 아닌 바로 지금 바다에 가고 싶어졌다. 묵기로 했던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고대했던 비키니로 갈아입었다. 위에는 원피스를 걸쳐 입고 바다로 갔다.


해수욕장은 폐장된 지 오래였고 여기저기 수영금지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안전요원이 없으니 위험하다는 이야기였다. 바다에도 수영하는 사람은커녕 수영복 차림조차 하나 없었다. 일상복을 입고 바다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이대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비키니를 입으려고 이곳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참을 걷고 걸어 사람이 안 보이는 바닷가에 자리를 잡았다. 돗자리를 피고서 털썩 앉아서는 멍하니 바다를 봤다. 처음엔 더우니까 단추를 조금만 열자며 다리 정도만 내놨다. 선글라스를 끼고 햇빛을 맞다가 윗단추도 조금 풀었다. 깔짝깔짝 간만 보다가 미친 척하고 원피스를 벗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만 볼 거 같다는 걱정과 달리 비키니만 입고 있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평소에 노출하는 편이 아니라 그런지 묘한 쾌감도 있었다. 벗는다는 행위 자체보다는 평소에 하지 않는 일탈처럼 느껴졌기 때문인 거 같다. 여행에 와서 새로운 나로 행동하는 재미랄까. 아마도 나한테 새로운 시도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깨달은 건 확실히 선글라스와 이어폰이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처음에야 눈치 보며 옷차림을 탈바꿈했지만 나중엔 돗자리에 드러누워있기도 하고 바다 근처로 가서 물을 담그기도 했다.


더워야 진정한 여름이라는 말을 했었는데 그곳에서 제대로 된 여름을 맛봤다. 타는 걸 무서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뜨거운 태양을 쬈다. 모래가 몸에 달라붙고 바닷물 때문에 찐득찐득해지는 것도 찝찝하지 않았다. 문득 나한테도 이런 내가 너무 새로워서 실성하고 웃기도 했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계획할 때도 내가 진짜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려울 것도 없었다.


사실 두 번째 여행까지 계획했던 일정을 첫날에 모두 끝내버렸다. 다음날은 뭘 해야 할지 생각해둔 게 없었다. 다시 한번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했다. 계획도 없이 시간 낭비 하는 거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나는 휴식을 취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을 잘 활용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건 휴식이 아닌데 싶었다. 돈낭비 시간낭비가 되더라도 충분히 쉬자는 것으로 생각을 바꿨다. 완벽한 휴가가 될 수 있던 건 이런 생각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에선 밤마다 캠프파이어가 있다고 했지만 첫날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내가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에는 다락방이란 공간이 있었는데 밤새 조용히 책을 읽거나 작업할 수 있는 곳이었다. 샤워를 하고서 다락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해변에서 찍은 사진으로 드로잉도 하고 바리바리 가져온 책도 읽었다. 하루를 정리하며 일기도 썼다. 


평소의 패턴이 바뀌기는 쉽지 않아 일찍 잠에 들었는데도 새벽에 잠이 깼다.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새벽 1시쯤 다락방에 다시 찾아갔다. 고요한 새벽 혼자만의 공간에서 읽다 만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이 순간은 여행 가기 전에 꿈꾸던 계획 중 하나였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도 그 시간까지 즐길 수 있는 여행을 원했다. 


새벽 3시가 돼서야 침대로 돌아가며 내일도 무난한 하루를 보내길 바랬다. 잠에 들면서 한편으론 계획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함이 계속 남아있었지만 낭비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나를 달랬다.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잠에 든 건 오랜만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여름휴가_0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