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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Sep 25. 2023

여름휴가_03

바로 그 순간 맛보는 행복

겨우 잠에 들려고 하는데 새벽 5시쯤 밤새 놀고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침대에 눕는 게 아니라 한참 동안 소음이 이어졌다. 씻고 대화하는 소리가 도무지 끝나지 않았다. 내일 얼굴을 마주해야 될지 모르는데 괜히 불편하게 만들까봐 침대에서 몇 번이나 고민하다 결국 커튼을 열었다. 


정면에 눈을 마주친 사람이 있었다. 잠을 못 자겠어요 한 마디를 했고 그 사람은 바로 사과하며 조용히 하겠다고 말했다. 다시 커튼을 닫고 침대에 누우면서 잠을 설쳐 여행을 망치는 건 아닌지, 괜히 저 사람에 한 마디 한 것 때문에 내일 방 사람들과 불편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모두 접어두고 일단 잠을 자기로, 지금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었다.


알람을 듣기 전에 비몽사몽한 상태로 일어났다. 아직 새벽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시계를 보니 벌써 9시가 넘어있었다. 11시에는 숙소 청소를 한다고 되어있었으니 서둘러 준비하기로 했다. 커튼을 열고 나가보니 대부분 이제 일어나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 마주쳤던 그 사람은 체크아웃을 한 건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따지고보면 4시간 정도밖에 못 잔 건데도 자는 동안만큼은 꽤 깊게 잠들었던 것 같다. 부지런히 씻고 준비를 마쳤다. 오늘의 옷차림은 평상시에 입어본 적 없는 크롭 나시티였다. 레이어드용으로 입어야지 하고 사면서도 내가 이걸 단독으로 입을 날이 있을까 싶었는데 이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마침 날씨도 상당히 더웠다.


옷차림에서부터 평상시와 다르니 확실히 여행 온 느낌이 났다. 밖으로 나가는데 괜히 마음이 신났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계획된 게 없었다. 버스에 타면서부터 어디로 갈지 정하기 시작했다. 전날 새벽까지 여기를 가야겠다며 정해둔 식당은 패스하기로 했다. 전날은 가고 싶었어도 오늘은 먹고 싶은 게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원래 가려고 했던 식당 근처에서 다른 곳을 찾았다. 강릉에서는 하얀 순두부만 먹어봤었는데 이 날은 매콤한 순두부를 먹고 싶었다. 보통 그런 찌개는 2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했는데 운이 좋게 이곳은 1인분도 식사가 가능했다. 오히려 더 좋은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기다리지 않아도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연히 찾아온 곳이었지만 사람들한테 꽤 유명한 맛집 같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했고 주문을 하자마자 한 상이 차려졌다. 마음 같아선 막걸리도 하나 시켜 마시고 싶었지만 한 병이 1.5리터 페트병 크기만큼 많았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처음 먹어본 매콤한 순두부는 강릉에서 먹었던 음식 중 최고로 꼽을 만큼 맛있었다. 유독 여행할 때 위가 작아져서 더 들어가지 않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남은 음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숟갈씩 더 먹다가 결국은 수저를 놨다. 남은 음식을 모두 싸가고 싶었다. 새로운 맛집을 알았으니 다음번에는 누구를 데려와 소개해주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식사를 마치고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카페를 갈 생각이었는데 정말 배가 너무 불렀다. 이대로 가면 자리에 앉아있기도 불편할 거 같았다. 문득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올해 내 소소한 행복 중 하나는 혼자서 인생네컷을 찍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혼자 처음 인생네컷을 찍어본 것도 올해 강릉을 방문했을 때였다. 


검색해보니 바로 근처에 포토부스가 있어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알고보니 식당 안에 웨이팅 하는 사람들이 많아 포토부스를 세워뒀다고 했다. 예전에 가본 적 있는 식당이었다. 모두가 식당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여유롭게 인생네컷에 들어갔다. 주섬주섬 짐을 내려놓고 결제를 마쳤다. 원하는 프레임을 설정하고 부랴부랴 포즈를 취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왜 이렇게 뚝딱거리는지 모르겠지만 뭐 나름대로 괜찮았다. 마침 화장도 옷차림도 만족스러운 날이라 그런지 한 번에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졌다. 이 정도면 만족해, 하고서 다시 주섬주섬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날은 여전히 뜨거웠다.


무튼 카페는 전날 정해뒀던 곳으로 갔다. 미리 알아본 건 아니었고 여기도 우연히 검색하다 알게된 곳이었다. 예쁜 단독주택 같은 곳인데 노란색의 벽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부부로 보이는 사장님들이 반겨주셨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얼마 없었다. 덕분에 편한 자리에 앉아 혼자만의 공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푸딩과 커피를 주문하고는 거울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워낙 공간이 소담스럽게 꾸며져 있어 어디를 찍어도 마음에 들었다. 기다리고 있으니 금방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이때 이 순간이 아주 행복한 기억으로 남겨져있다. 아직 맛을 보기 전이었지만 눈으로 사진을 찍은 것처럼 아름답게 담긴 푸딩을 받아드는데 벌써 기분이 좋았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카페에는 여유롭게 머물 생각이었다. 어제 읽다만 책을 펼쳐들었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라는 책이었다. 여행산문집인데 작가님이 여행하며 만났던 사람들, 평소의 생각들이 담겨있다. 여행을 가기 전에 도서관에 들러 여행 맞춤으로 빌려온 책이었다. 카페에서 읽으니 더 집중이 잘 됐다.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기는 어려울 만큼 다양한 감정들이 나열되는 책이었는데 그게 마침 강릉하고 잘 어울렸다.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누군가와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꼭 강릉을 찾았어서 그런지 강릉에는 여러 감정들이 녹아있다. 혼자서 강릉을 올 때는 대부분이 힘든 일을 끝내고 드디어 쉴 수 있을 때 왔던거라 지쳐있던 날들이 많았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온전히 노는 것에 집중한 적은 없었다. 문득 지금 주어진 여유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꽤 긴 시간 머물면서 현재의 감정들을 느껴지는 대로 모두 느꼈다. 식당에서 너무 배부르게 먹은 탓에 푸딩과 커피는 거의 남기고 말았다. 자리를 정리하고 식기를 반납하며 괜히 사장님께 말을 붙였다. 푸딩은 너무 맛있는데 배가 불러서 남겨요. 사장님도 따뜻하게 웃어주셔서 왠지 안심이 됐다. 이 카페가 오래오래 남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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