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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Sep 08. 2023

월말정산_08_02

변수에 절망하기보다 즐겨버리기

8월엔 그런 형부, 언니와 함께 드레스 투어도 떠났다. 정말 투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열찬 일정이었다. 고작 세 군데 샵을 들러 드레스를 보는 거였지만 나름 주어진 임무가 많았다. 특히 언니는 결혼식 자체를 귀찮아하는 사람이라 내가 더 오버해서라도 잘 골라주고 싶었다.


가장 신경 썼던 포인트는 드레스 입고 나왔을 때 리액션! 언니가 준비하는 동안 형부에게도 신신당부했던 내용이다. 사실 커튼이 열리자마자 준비된 것처럼 환호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였고 실제로 해보니 훨씬 어려웠다. 처음 갔던 샵이 워낙 정적이라 더 어색했던 것도 있긴 하지만 드레스가 바뀔 때마다 자연스러운 리액션을 하는 건 노련함이 필요하다.


뭐 그래도 샵을 이동할 때마다 형부도 나도 지쳐서 정신을 놓은 덕분에 맥락 없는 환호성이 계속 이어지긴 했다. 실성에 가까운 외침이었는데 그런 리액션이 언니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 도움이 되는 거 같긴 하다. 


또 다른 임무는 드레스를 도안에 기록하는 일이었다. 결혼한 친구에게 물어보기 전까진 드레스 투어에서 사진촬영이 안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친구에게 미리 팁들을 구하면서 다들 도안 같은 걸 들고 가서 디테일들을 그림으로 남긴다는 걸 알게 됐다.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오는 그 짧은 순간마다 디테일을 살려 드로잉을 하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크로키 연습이 이렇게 쓰일 줄은 또 몰랐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언니는 무사히 원하는 드레스를 결정했다. 12벌을 입어봤는데 마지막 드레스를 골랐으니 많은 드레스를 입어본 게 헛수고가 아니었다. 다른 샵에서와 달리 언니가 확실하게 원하는 드레스가 있었다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드레스인지와 관계없이 언니가 직접 골랐다는 게 더 의미 있었다. 귀찮다며 취소할까 고민하던 샵에서 가장 원하는 드레스를 발견했으니 역시 사람일은 알 수 없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자면 8월에 잠을 유독 못 잤다. 안압은 몸상태를 눈치챘는지 귀신같이 다시 올랐고 포도막염도 재발해서 고생하는 중이다. 나을 만하더니 다시 잠을 못 자고 수면패턴이 어그러지는 바람에 염증이 오래가고 있다. 자주 재발하면 대학병원을 가보라고도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잠을 못 자서 생기는 게 분명하다. 입막음 테이프도 붙이고 프리페민정도 먹어봤지만 8월엔 그닥 효과가 없어서 많이 아쉬웠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에 아쉬움을 느낀 건 또 있었다. 여름휴가는 작년부터 나름대로 바라고 바랬던 일정이라 제대로 준비하고 싶었는데 날씨 때문에 변수가 생겼다. 9월이 시작한 월요일에 바로 출발하려 했지만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막상 월요일이 되고 나니 비소식이 사라져서 더 약 올랐다.) 


날씨야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속상해서 저절로 날이 바뀌기만을 바랬다. 그래봤자 태풍은 점점 다가오기만 할 뿐 물러갈 생각이 없었다. 처음엔 어쩔 수 없지, 쿨한 척하면서 장소를 바꿀까, 비가 오더라도 가볼까 싶었는데 결국은 변수 때문에 당황한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통제할 수 없는 거에 연연하며 속상해하는 모습이 싫어서 대충 넘어가려고 했지만 딱 걸려버린 것이다. 아직도 난 내가 바꿀 수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 매달리고 (가끔은 집착하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바뀐 건 바뀐 것일 뿐 그대로 인정해버리는 게 더 편할 수 도 있다는 걸 머리에 마음에 새겼다. 막상 계획을 바꾸고 보니 날씨가 더워져 해변에서 놀 수 있을 거 같아 좀 기대가 되기도 한다. 


또,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그만 놓아주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로 현재를 채우려고 한다. 잠을 잘 자서 안압이 오르지 않게끔 통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아쉽게도 그럴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디카페인이 들어간 커피라도 좀 멀리하고 잡생각이 많이 쌓이지 않게 명상을 다시 이어가는 것, 처방받은 안약을 시간 맞춰 잘 넣는 것뿐이다. 


다시 한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하고 마음을 비우려고 한다. 그럼 다시 원래의 패턴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월말 정산을 쓰려고 했을 뿐인데 이래저래 할 말이 굉장히 많았던 것 같다. 이렇게 쌓여있었으니 잠이 안 왔던 건가 싶기도. 


이제 9월의 계획을 말해보자면 일단 당장은 휴가를 잘 다녀오려고 한다. 강릉은 워낙 자주 찾았던 휴가지라 가려는 곳이 대충 비슷하긴 한데 날씨가 어떻든 내가 푹 쉬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맛있는 음식, 좋아하는 바다와 함께 연말이 되기 전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또, 이건 새로운 포스팅에서 좀 자세히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 예술인 활동 증명이 완료됐다. 9월에는 창작 지원금 신청이 있어서 지원하려고 하는데 무사히 지원금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경제적인 안정이 있는 편이 글 쓰는 데에만 집중하기가 편하기 때문에 바라는 대로 꼭 이뤄졌으면 하는 소망. 그게 안되면 경제 활동을 시작해야겠지만 연말까지는 버틸 수 있으니 그건 그때 가서 계획하기로.


9월에는 아마 가족 모임이 몇 번 있을 것 같은데 그때마다 내가 편하게 있어보려고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어떤 척하지 말고 내 감정과 상태에 집중하며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미움받을 용기를 묻어둔 지 오래라,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 편이지만 이제 달라지기를 바란다. 계속 연습하면서 나아지고 싶다.


새로 시작하는 일도 있다. 스우파 2가 시작되며 다시 춤꾼에 대한 열정이 끓어오르지만 그 여파는 아니고 재즈댄스 및 케이팝 댄스라는 강의를 신청해뒀다. 한국무용을 이어서 들을까 생각하다 새로운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다. 처음 시도해보는 건데도 떨리기보다는 기대되고 설렌다. 야간 강의라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으니 더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론 역시나 글이다. 7월에 시작한 글이 계속 이어지는 중인데 짜놓은 구조대로 진행하기보다 내용을 계속 추가하다보니 중간에 길을 잃은 상황이다. 휴가를 즐기는 동안 글에서 좀 멀리 떨어졌다가 다시 돌아와 시작해보려고 한다. 뭐가 됐든 틀리지 않을 생각으로 괴로워하기보단 틀리더라도 고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여유롭게 내 글을 이어나갔으면 좋겠다. 


두서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사실 나도 이런 식으로 흘러갈지 몰랐다. 글 쓰는 것만 해도 내가 예측한 대로 굴러가지 않는데 내 인생이라고 계획한 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싶다. 어떤 날에는 갑자기 생긴 변수 때문에 당황스러워서 기분이 다운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변수가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을 선사해주기도 한다는 걸 이젠 좀 알 것 같다.


비키니를 입겠다는 버킷리스트가 지켜질 수도 있겠다는 지금, 휴가를 다녀오고 기대 이상으로 재밌었다는 후기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것 만큼은 변경되지 않길!) 변수가 생기면 계획이 바뀐 대로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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