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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Oct 30. 2023

여름휴가_07

아무리 써먹어도 닳지 않는 기억

마침 해가 뜨기 시작했다. 구름의 밑부분이 태양에 그을린 것처럼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 구름만 걷히면 정말로 해가 보일 것 같았다. 오늘은 어쩔 수 없나 싶어 그 모습이라도 영상으로 남기려 촬영했다. 그러다 아주 잠깐 구름과 지평선의 사이로 살짝 틈이 생겼고 그때 태양이 떠올랐다. 


계속 눈치만 보며 “해 뜬 거 아니에요?” 만 외치던 우리는 “지금!”이라 소리 지르며 일출을 구경했다. 바다에 와서 일몰을 보는 건 종종 있었지만 일출을 보는 건 아주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더욱이 혼자서 보러 온 게 아니라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보러왔다는 게 내겐 큰 의미가 있었다. 사람들에 속해있다는 게 묘한 안정감을 줬다.


마지막으로 일출을 본 게 언제인가를 떠올리면 작년 상업영화 팀에서 일할 때 새벽 촬영을 대기하거나 밤샘 촬영을 끝내고 본 게 최근이었다. 그땐 태양이 뜬다는 게 일출이라는 낭만적인 명칭으로 불리기보다는 촬영준비 혹은 촬영 종료라는 업무적인 요소 중에 하나였다. 그 순간을 즐기기는커녕 단순히 극한의 스케쥴을 의미하기만 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아주 여유롭게 바닷가에서 일출을 보고 있으니 새삼 행복했다. 정말로 이번 휴가에서 하고 싶었던 것들은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감을 모두 먹어치운 것 같았다.


공황증세를 진정시킬 때 종종 시도하던 방법이 있다. 먼저 아무런 불안도 섞이지 않은 평화롭고 행복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 기억을 그리며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는 것이다. 그럼 마치 그때 머물렀던 감정처럼 지금의 내 상태도 조금씩 차분해진다. (눈을 감고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면 안정되는 효과가 입증되었다.)


나는 교환학생을 떠나 스페인인을 여행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하필 머무르는 기간 내내 계속 비가 내렸다. 아쉽기는 했지만 마침 교환학생이 끝나갈 무렵이라 여러 여행으로 많이 피곤했을 때였다. 밖을 돌아다니기보단 숙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름 편한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웠던 건 바르셀로나 해변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거였다.


스페인을 떠나는 날,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게 갰다. 아침 일찍 부터 공항에 가있던 터라 떠나려면 시간이 좀 남아있었다. 공항에서 대기하는동안 해변에 다녀올까 몇 번이고 고민했다.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이미 짐을 다 싸서 나온 상황이라 캐리어를 끌면서 바다에 다녀온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고민이 됐다. 


그러다 불쑥 ‘언제 다시 올 수 있겠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민이 길어도 결정을 내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꼭 무언가를 두고 온 사람처럼 공항에서 뛰쳐나갔다. 해변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캐리어에 배낭까지 짐은 한가득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바다로 가는 동안 내내 마음이 설렜다. 룰을 어긴 것 같은 묘한 쾌감까지 느껴졌다. 


바다에 도착해서는 다리 밑에 캐리어를 묶고 두고 모래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떠날 시간은 코앞이었고 내 차림새도 편한 비행을 위한 복장이라 바다를 즐기러 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망설임 없이 양말을 벗고 바다로 들어가 물을 밟았다. 오히려 계획대로 따랐던 그 어떤 여행보다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될 줄은 그땐 알지 못했다. 


혼자서 바다를 즐기다 돌아갈 시간이 됐다. 대충 발에 붙은 모래들을 털어내고 있는데 어떤 스페인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뭐라고 말을 걸었는데 너 정말 즐겁게 노는구나 뭐 그런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내가 진심으로 즐겼던 그 순간, 그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도 전달됐던 그때의 기억은 내게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으로 남았다. 


공황장애 증세로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 나는 이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나를 진정시켰다. 아무 상처하고도 연관되어있지 않은 이 순간은 언제나 나를 도피시켜줬다. 몇 번이고 써먹어도 끄떡없었다.


이번 여행이 끝날 무렵, 언젠가 공황 증세가 다시 찾아오게 된다면 이번엔 강릉으로 위로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에 대한 확신을 되찾으며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일출을 보게 된 이 순간은 그만큼 내게 너무 강렬한 행복과 평화로움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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