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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Jan 15. 2024

후각_02

나 - 1 = 나

약을 쓰면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후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한 결과, 평소 느끼던 후각의 약 10% 정도를 느낄 수 있다. 그나마도 약을 먹었을 때뿐이고 아침이 되었을 때나 약기운이 사라졌을 땐 냄새가 사라진다. 식초나 매니큐어 아세톤 같은 향이 강한 냄새를 맡아도 자극만 느껴질 뿐 아무 향이 나지 않는다.


처음엔 많이 무섭고 속상했다.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을 빼앗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특히 아침에 일어나 차 한잔을 마시는 게 내겐 소중한 즐거움이었다. 다양한 차를 구비해두고 기분에 따라 원하는 향을 골라 마시곤 했다. 향을 잃은 요즘, 녹차와 카모마일 차 두 개만 번갈아 마시는 중이다. 기분을 달래기 위한 약처럼 마실 뿐 그날에 따라 향을 선택하고 즐기던 일은 사라졌다.


인터넷에 검색하니 나와 비슷한 사람이 꽤 많았다. 후각이 완전히 돌아오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는 사람도 있고 2년이 걸렸다는 사람도 있었다. 병원에 다니며 재활훈련을 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보니 익숙한 향을 맡으면서 기억하는 냄새를 떠올리면 후각세포를 자극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에 집에 있는 향수들과 강한 냄새들을 가진 물건들을 찾아 하나씩 킁킁댔다.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경우도 있었고 맡아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약을 먹으면 금방 좋아질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10퍼센트 이상으로는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점점 불안해졌다. 처방받은 약을 다 먹고 다시 병원을 방문했다. 냄새가 나긴 하지만 예전 같지 않다는 말에 그 상태가 이미 후각이 다 돌아온 걸 수도 있다고 말하셨다. 추가로 약을 쓰면 더 좋아질 거란 말을 기대해서 그런지 의사 선생님의 말에 심하게 흔들렸다. 우선은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볼 수 있게 의뢰서를 받고 약을 추가로 처방받았다. 불안한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시원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속상한 마음에 슬픔을 터트리며 울었다. 처음엔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감기에 걸리고서도 바로 병원에 가지 않고 마스크를 하거나 입을 막는 일 없이 기침하며 결국 나와 엄마에게 감기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옮긴 건 아니라며 이해해보려 해도 해결책이 없으니 아빠에 대한 원망이 올라왔다. 그 마음을 부정하지 않고 속상한 마음과 화나는 마음을 충분히 느꼈다. 감정을 억누르는 대신 터트릴 만큼 터트리다보니 차츰 마음이 진정됐다.


아빠에게 화가 나는 건 사실 후각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을까봐 겁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화를 낸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거란 것도 알았다. 내가 원하는 건 누군가에게 화풀이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후각이 돌아올 수 있게끔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우선은 처방받은 약을 잘 챙겨먹으며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에 전화해 진료 예약을 잡았다. 인터넷에서 말하는 대로 레몬, 장미, 유칼립투스, 계피 향이 나는 물건들을 맡으며 재활훈련을 하는 게 최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불안한 마음이 생겨난 이유도 생각해봤다. 그건 아마도 나란 사람이 하나 없어지는 거 같았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예전부터 공격적으로 들어온 탓에 예민하다는 말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한편으론 그 예민함이야말로 나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였다. 날이 선 칼날처럼 날카로운 감각 때문에 자주 아프기도 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나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 정체성 하나가 사라진다고 하니 나라는 사람이 달라질까 싶어 겁이 났다.


지금의 나에서 하나가 빠지면 내가 아니게 될까? 예민했던 내가 예민해지지 않으면 나라고 말할 수 없는 걸까? 가치가 사라지는 걸까? 내 일부를 잃는 걸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건 아직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기 때문인 것 같다. 드라마 pd를 준비하다 언론고시를 포기했을 때, 가장 믿었던 친구와 관계가 끊어졌을 때, 발가락이 부러져 일을 그만두게 됐을 때, 예상치 못하게 변해버린 상황은 늘 나를 흔들었다. 변해버린 나는 꼭 내가 아닌 것 같이, 망가진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은 언제든 생겨나는 법이고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해가든 그 모습 역시 나라는 사람이다.


물론 모든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아직 쉽지 않다. 지금 갖고 있는 건 하나도 잃고 싶지 않은 욕심이 더 크다. 하지만 어떤 걸 잃어버렸을 때 놓친 순간에 잠식되어 또 다른 무언가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시선을 잘 맞춰야겠다. 나쁜 일이 생겼다고 그 일에 잠겨 매일을 슬퍼하기엔 내가 놓칠 일상들이 아깝다. 이미 그렇게 시간을 보내본 경험이 있으니 그 행동이 얼마나 나를 갉아먹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우선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빠진 행복들을 채워야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려는 모습이야말로 정말 나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아직 모든 기대를 다 포기하고 싶진 않다. 후각을 완전히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도 하고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며 재활훈련을 하다보면 더 빨리 돌아올지도 모르니 일단은 기다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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