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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Jan 19. 2024

트라우마_45

느닷없는 해고통보

주말 사이 하고 싶은 걸 찾는 동안이라도 월급을 받으며 버텨보자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회사를 향하는 발걸음은 늘 그렇듯 무거웠지만 마음가짐 덕분인지 조금은 버틸만했다. 출근하고도 평소와 다를 거 없는 아침이었다. 운전면허를 땄다는 소식에 대표는 회사 차로 연습하면 되겠다며 나름의 축하를 전했다. 팀장은 아이템을 찾아보자며 새로 읽어볼 도서 목록을 내게 전했다. 


오전 업무가 시작되고 대표는 피디들 자리로 들어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 사람씩 면박을 주기도 했고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 이야기를 떠들어대기도 했다. 정말로 특별할 게 없는 날이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빡세냐고 물었다. 한 사람씩 물어가며 대답을 들었는데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대표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 물었고 딱히 할 말이 없던 나는 빡세지 않은 편은 아니라서 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대표의 비위를 맞추느라 늘 앞뒤가 다르던 옆자리 동료는 대표의 표정을 살피더니 빡세지 않다는 대답을 했다. 그 직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답을 했다. 


점심시간이 되고 대표와 팀장은 회사에서 먹기로 해, 피디들끼리 장부식당에 갔다. 식사 자리에서는 여지없이 대표에 대한 뒷담화가 이어졌다. 아까의 대화를 복기하며 본인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대표를 향한 험담들도 이제는 지긋지긋했지만 주말 내내 해탈한 마음으로 다스린 덕분인지 이 일상도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대표에게서 점심 이후에 잠깐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밥을 먹고 태표의 방에 들어갔을 때 대표는 퇴사를 언급했다. 해고 통보를 했으니 1달을 더 다니다가 나갈지 지금 나갈지 결정하라고 말했다. 늘 그만두고 싶다고 떠들어대긴 했지만 일방적인 통보였고 솔직히 큰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한 마디 해도 괜찮을 상황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나를 지키는 어떤 말을 꺼내지 못하며 아무 반응 하지 않는 게 휘둘리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멘탈이 나간채로 자리에 앉아 우선은 전달받았던 업무를 이어가는데 곧이어 팀장이 따로 이야기하자며 불렀다. 대표가 1달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피차 불편할 테니 오늘 나가달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사실은 1달이 지나면 회사에서 실업급여를 줘야 했기 때문에 그러기 전에 내보내려고 했을 뿐이었다. 이미 지쳐버린 몸과 마음으로 이곳에서 무언가를 위해 더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 더 힘들게 느껴졌다.


한편으론 회사에서 나를 먼저 끊어주니 오히려 편해지는 마음도 있었다. 따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해 오늘 바로 정리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조용히 자리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책상을 정리했다. 동료 피디에게 외장하드를 빌려 노트북 자료들도 정리하고서 완전히 포맷했다. 늘 떠날 마음이 있었는데도 차곡차곡 쌓아둔 짐이 많아 시간이 꽤 걸렸다. 짐을 정리하는 동안 최대한 덤덤하게 책상과 자료를 비워냈다. 아무 생각도 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날 나와 함께 떠나게 된 피디가 있었다. 그 피디는 먼저 자리를 정리하고 인사 없이 회사를 떠났다. 아마도 나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난 다른 선택을 했다. 그동안의 상황이 어찌 됐건 인사는 하고 나가자고 생각했다. 짐을 다 싸고 팀장과 대표를 각각 만나 마무리 인사를 했다. 대표는 상황이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며 혹시나 나중에 연락하면 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 말했지만 믿기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한 마음도 들어 대표에게 그동안 일하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팀장은 선배 모드로 돌아가 내게 충고랍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 인사하는 말로 더 준비가 되면 일을 해보려고 한다고 말하니 팀장은 내가 제작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사실상 회사에서 내가 제대로 해본 일은 기획 회의와 대표의 식당 업무가 전부였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내 적성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조금 웃기기도 했고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끝까지 웃으며 그 사람 말이 맞는 것처럼 이야기를 들어줬다.


충분히 화가 나고 서운한 그 상황에서 나는 괜찮은 사람을 연기하느라 대표와 팀장 누구에게도 나를 지켜낼 만한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피디들은 이대로 가지 말고 송별회라도 하자고 연락했다.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밑에서 조금 기다리다 근처 호프집을 가기로 했다. 나는 먼저 떠났던 피디에게 연락해 함께 자리하자고 붙잡았다. 이대로 헤어진다면 그 피디가 너무 힘들어할까봐 걱정됐다.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 한참 서럽게 우는 피디를 달래줬다. 정작 나도 같은 상황이었으면서 내가 어떤 마음이고 어떤 상태인지는 스스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송별회를 하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게 더 자존심이 상해 내 마음을 꽁꽁 숨기고 유쾌한 척을 했다. 아마도 그러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계속 부서졌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하필 월요일에 해고통보를 받았으니 갑자기 시간이 비어버렸다. 지옥 같은 출퇴근 길도 이제 사라져버렸다. 무엇보다 집에 가면 그 사실을 엄마에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상황이 끔찍했다. 결국은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먼저 짤렸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나는 이렇게 내 무능력함만 증명하고 남게 됐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초라했다. 며칠간은 회사를 나가는 척을 해볼까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문을 여니 엄마는 여느 때처럼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자 숨겨온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도무지 연기를 한다거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참아왔던 서러움과 좌절감이 쏟아져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 회사 안나가게 됐어.”라고 말하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엄마가 실망했을 거라 생각했다. 이참에 쉬라며 나를 달래줬지만 엄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누구라도 나를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나는 정말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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