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루는 것
드디어 내일배움카드로 첫 수업을 들었다. 내가 신청한 건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함께 배우는 일명 포토스트레이터 강의였다. 당장 디자인 쪽에서 일한 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일하는 분야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였지만 막상 수업을 들으니 그건 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디자인 프로그램을 잘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도 당장에 필요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매번 제쳐두곤 했다. 사실 수업 전날 까지도 괜히 듣는다고 했나 부정적인 생각이 문득 올라오기도 했다. 미리 걱정하지 말자는 다짐을 마음에 새기곤 하지만 습관처럼 당장의 성과를 바라는 게 익숙하다보니 아직 들어보지도 않은 수업을 판단하려 한 것이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강의라 7시쯤 일어나 서둘러 준비해서 수업을 들으러 갔다. 집에서 꽤 멀리 있는 곳이기도 했고 내일배움카드로는 처음 들어보다보니 관련해서 설명도 듣고 출석체크도 따로 해야 해서 더 서둘렀다.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거라 조금 긴장하기도 했는데 막상 수업이 시작되자 모두 별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배운 것들이 모두 헛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디자인 프로그램이 발전 해 온 과정과 그 역할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주셨는데 곳곳에 내가 배워온 것들이 녹아있었다. 포토샵은 사진이 현상되어 나온 후 수정작업을 담아낸 프로그램이라 했다. 카메라들을 설명해줄 때 브랜드명이 쭉 나열되고 가장 기술력이 좋았던 나라를 퀴즈 문제로 주셨는데 단박에 답을 알 수 있었다. 라이카라는 스펠링이 독일의 발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답을 맞힌 건 카메라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이라기보단 독일어를 읽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전공했던 건 은연중에 내게 남아있었다. 이후 중간중간 질문하는 문제들도 답을 맞힐 수 있었는데 단편 영화 연출 수업을 들으며 카메라 렌즈에 대해 배웠던 게 도움이 됐다. 잊어버린 줄 알았지만 내게 남아있는 게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나를 이루는 많은 것들이 그런 거 같다. 나는 자라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기억이 너무 희미해서 안정감을 느끼는 법이 없었다. 허구의 독립을 겪어내며 힘든 일이 생기면 주변에 털어놓지도 못하고 혼자 앓기만 했다. 불안한 결정들 앞에서 혼자 해결하겠다 나섰지만 쉽게 흔들리며 주변을 붙들고 싶어 혼란스러워 했다.
이 뿌리없는 흔들림은 아빠와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조금씩 변화했다. 2년 전 한 드라마 제작사에 입사를 앞둔 때였다. 언론고시를 오래 준비하다 너무 지친 상태였고 나를 받아준다는 제작사를 겁도 없이 지원한 상태였다. 하도 제작사에 관해 엄한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보니 들어가기 전부터 겁이 났었다. 아빠는 그 내막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고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일을 계속한다고만 생각했다.
입사를 축하할 겸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아빠는 내게 여러 이야기를 해줬다. 그중 두고두고 내게 힘이 된 말이 있었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해야 돼.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게 더 슬픈 일이야.”
대학 입시를 앞두고 나는 부모님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적이 있다. 나는 이제 하고 싶은 일 (그때는 연극이었지만, 그건 예술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대상이었다.) 을 할건데 앞으로 부모님 용돈을 잘 못 챙겨줄 수도 있다고. 사실 그때의 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면죄부가 필요했다. 성공하지 못하면 부모님께 죄책감을 느끼는 아이였기에 내게 그런 걸 바라지 말라고 미리 선수를 친거다.
그걸 잊고 있었는데 아빠는 그때 내가 대단하다 생각했다고 말해줬다. 아빠는 하고 싶은 일을 한다기보다 늘 주어지는 일을 해왔다 보니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내가 멋있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늘 그런 일을 하라고 말해줬다. 아빠의 그 믿음이 내겐 언제든 돌아갈 비빌 언덕이었다.
좋아하는 일만큼 성과를 내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나를 속이며 대충 따라가기보다는 내 마음에 계속 질문하며 좋아하는 걸 찾고 그걸 쫓아서 살아왔다. 가끔은 당장 배우려는 것, 그리고 배워온 것들이 어디로 갔나 싶을 때도 있지만 수업에서 다시금 느꼈듯 내가 배운 것들은 모두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그 많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수업자체는 첫날이라 프로그램을 다루는 법보다는 이론 위주로 진행해서 디자인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할 건 없었다. 알려주시는 대로 나는 떠듬떠듬 프로그램 항목들을 알아갔고 그 과정은 내가 처음 프리미어를 배웠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건 또 어디에 써먹을까 싶기도 하지만 결국은 내가 하려는 일에 녹여낼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