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_01

회피와 알아차림

by 김물꽃

전의 포스팅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내 감정을 눌러버리는 방어기제가 있다. 특히 부정적인 기분이 들 때면 그 상태를 제대로 느끼고 넘어가기보다는 일단 넘겨버리고 머리로 이해하려고 한다. 내 상태에 대해서는 인지했기 때문에 요즘에는 하루하루 내 감정을 돌아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2월부터 드로잉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건 내게 말보다도 편한 일인데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내는 건 쉽지 않았다. 글과 그림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싶어 드로잉을 배우게 됐다. 강의 3개를 패키지로 배우는 수업이 있어 바로 등록했는데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수업, 눈에 보이는 걸 빠르게 그려내는 크로키 류의 수업, 사물을 정밀하게 그려내는 소묘 수업으로 이뤄져 있다.


내가 제일 애를 먹는 수업은 소묘수업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더라도 막상 그려지는 걸 보면 사물과 닮아있지 않아 스스로도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만은 늘 정성을 다해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번 수업에서 그 혼란이 배가 되는 일이 있었다.


수업 내용은 저번과 달라진 게 없었다. 앞에 보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면 됐다.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나름대로 열심히 형태를 잡았다. 강사님은 지나가다 툭 이게 아니라며 조언을 해주셨다. 항아리 같은 구조의 물체였는데 밑바닥 부분의 원 모앙이 주둥이 부분보다 더 폭이 커야 한다는 거였다. 사실 내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달랐지만 조언을 듣고 원래의 형태를 떠올리며 더 폭을 넓혔다.


그리곤 위에 올려진 삼각뿔을 그리는데 연필로 기울기를 대강 잡아서 종이에 옮겨보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마음에 안 드는지 이게 아니라며 기울기가 더 가팔라져야 한다고 말한 뒤 넘어갔다. 이게 어렵나? 쉬운 건데 이게 왜 어렵지? 그런 말을 하면서 넘어가니 조금 불쾌했지만 내 실력이 부족한 거니 그 불편함을 표현하는 게 좀 섣부르다 생각한 거 같다.


한편으론 나부터가 답답하기도 했다. 대충 그리려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첫날 수업을 들으며 깨달았었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다고 그게 정말 보이는 걸 담아내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길쭉한 직육면체를 비스듬히 그려낸다고 할 때 사실 사진으로 담아낸다면 길쭉한 변이 짧게 보이는데 내가 이미 그 변이 길다는 걸 알고 있으니 보이는 것보다 더 길게 그려버리는 것이다. 내 관념이 시각을 방해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고작 3번째 수업만에 관념과 시각을 아예 분리시킨다는 것도 내겐 쉽지 않았다. 애를 쓰고 있었지만 조언을 준다기보다 쉬운데 이걸 못하냐는 핀잔을 들으니 화가 나서라도 잘 그려내고 싶었는데 핀잔을 더해가기만 하니 사기가 꺾였다. 사실 실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거라 다른 사람들과 그리 차이가 크지 않은데 오히려 강사님께서 내 그림에 꽂혀 더 예민하게 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가 불쾌함을 표현하면 분위기가 애매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저 묵묵히 그림을 이어갔다.


그리 달라진 것도 없었지만 강사님은 또 갑자기 다가와서 훨씬 좋아졌다며 말을 했다. 보이는 대로 그리라는 말에 눈에 보이는 걸 담아냈지만 강사님의 꾸중에 사물을 보지 않고 종이만 보며 그리는 게 맞는 건지 좀 혼란스러웠다.


수업이 끝나고 총평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보니 다들 잘 그려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린 형태와 차이가 확연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때에도 차이를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 됐을 일인데 나는 습관적으로 그때 내가 느끼는 감정들에 확신이 없었다. 이 정도로 불쾌해도 되는지 조심스러웠다.


원래 같았으면 집에 가는 일이 굉장히 뿌듯하고 후련했을 일이었다. 하루종일 드로잉 수업을 들어도 내가 재미있게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 날은 집에 가는 내내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들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이 감정을 머리로 이해하려 했다. 강사님이 내 실력을 좋게 봐서 더 기대해가지고 강하게 말했나보다, 내가 대충 그린다고 생각했나보다, 강사님이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몸상태가 안 좋으니 더 예민했나보다 등등 내 감정을 이해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상황을 더 고려해보려 노력했다.


당연하겠지만 이 과정으로는 내가 후련해지지 않았다. 잠에 들기 전, 하루를 돌아보며 내 감정을 들여다봤다. 왜 이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 건지 궁금했다. 그건 내가 내 감정을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 상황에 분명히 불쾌함이 들었다. 그림에 도움이 되는 지적이나 조언이라면 달갑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쉬운데 왜 못하냐는 식의 핀잔은 의도가 불분명했다. 강사님이 어떤 의도로 말했든 그건 결과적으로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밖에 일궈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조언을 하며 지나가긴 했지만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있는 분들이 많아서인지 그런 식의 핀잔보다는 그림을 수정할 방안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또, 나는 입시를 준비하거나 대회에 나가기 위해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 가볍게 말하자면 취미로 즐기기 위해 내 돈을 내가며 듣고 있는 거였다. 수업 분위기를 혹시나 해칠까 내 감정을 무시했지만 실은 같이 수업 듣는 사람들을 신경 쓰는 것만큼 수강생이라는 동일한 입장인 내 감정도 신경 써야 했다.


내 감정을 잘 챙기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 감정이 불러일으킬 나쁜 결과들을 미리 예측하며 불편한 감정들을 회피해버린다. 내가 만약 강사님의 핀잔에 불쾌함을 드러냈을 때 강사님이 더 불쾌해하며 내게 페널티를 주면 어떡하지? 수강생들한테 내가 예민한 사람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들이 감정을 마주하는 걸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단 그 상황은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나는 충분히 짜증이 날 상황이었고 내가 화를 냈을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또 최악의 경우 수업을 그만 듣게 된다면 환불받고 다른 수업을 들으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화를 내는 상황에 대해서 최악의 경우들을 떠올리느라 자꾸 회피해버린다. 위에서는 나쁜 경우들을 떠올렸지만 내가 바랬던 건 그냥 눈에 보이는 걸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에 어떻게 하면 잘 그려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아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배우러 온 입장이기 때문에 그 기술만 알고 싶을 뿐, 강사님에게 똑같이 공격하거나 내 감정에만 취해 분위기를 망칠 생각도 없었다. 사실 내가 나를 믿어주면 그만일 텐데 아직은 이 과정이 내게 익숙하지 않아 내 감정을 알아차리기 전에 회피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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