줏대없이 끌려다니기

트라우마_07

by 김물꽃


전남친과 사귀기 시작했을 때 우리 팀은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일정이 밀리고 밀려 원래 잡혀있던 스케쥴이 꼬이게 된 것이다. A팀 B팀으로 나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일정들이 촉박하게 물려있다 보니 선진행팀이 차출 되어 다음 현장을 미리 세팅 해두는 식으로 스케쥴이 나눠졌다.


촬영 분량은 한참 남았지만 이미 일정표에서 예정되었던 크랭크업 날짜보다 1달 정도가 밀려있었다. 때문에 휴차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현장 근처 숙박을 잡기 어려워 출근 길로만 차로 40분 정도 거리를 다니기도 했다. 매일이 고된 스케쥴이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제작팀은 촬영의 시작하기 전 시작을 준비하고, 촬영이 끝난 후 끝을 마무리하는 입장이라 다른 팀들보다 더 오랜 시간 일을 한다. 원래도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이 때는 기본 3,4시간 정도 잠을 자면서 제대로 된 휴차 없이 일을 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전남친은 매일 데이트를 하자며 불러냈다.


촬영만으로도 동이 나버린 체력이라 30분이라도 잠깐 보자며 불러내는 일이 사실은 많이 버거웠다. 더욱이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몰래 만나려다 보니 만나는 순간부터 늘 긴장 상태에 있으니 얼굴을 보고 돌아가면 진이 다 빠졌던 거 같다.


내가 있던 숙소와 전남친의 숙소가 또 30분 정도의 거리로 떨어져 있다 보니 전남친이 오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내가 피곤하기도 했지만 전남친도 피곤할 거라는 생각에 회유도 해봤지만 서운한 티를 보였다. 그때는 전남친이 그걸 감수하면서 오겠다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나 역시도 내 체력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잠깐이라도 만나는 게 맞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하던 일은 각 팀 스태프들, 새로 오는 스태프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많았다. 일 때문에 사람들과 연락을 자주 하다 보니 원래도 누군가와 연락을 빈번하게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더욱이 전남친과는 몰래 만나는 입장이라 일하는 시간에는 더 조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전남친은 그 일로도 많이 서운해했다.


사실 전남친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게 그냥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으니 나한테 바라는 게 또 있었을 거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사실 나만큼은 다른 사람보다도 나를 더 먼저 신경 썼어야 한다는 거다. 나에게는 나의 이유가 있었다. 상사들과 내가 한 연락을 공유하며 보여주기도 하고 컨펌을 받기도 하다 보니 전남친과의 연락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연애만큼이나 일이 중요한 사람이었고 만나는 사람이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만나는 걸 그만둬도 괜찮았다.


하지만 전남친이 내게 서운한 반응을 보일 때면 나는 나대로 이걸 왜 이해 못 해주지 싶었지만 애초에 연애를 해본 적이 없으니, 또 나는 내 선택들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니 잘못을 추궁하면 추궁하는 대로 내 잘못으로 받아들였다. 그럼 난 다시 일하는 중간중간 시간을 쪼개 다시 전남친을 달래는 연락들을 해주고 일이 끝나면 시간을 쪼개 전남친을 만나고 내 피곤함만 더해가는 날들이 이어졌다.


만나면 만날수록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원체 제작팀이 전우애 같은 마음으로 뭉치는 일이 잦아서 그런지 일이 끝나면 회식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애초에 제작팀은 식사를 다 같이 하는 게 원칙처럼 되어있다 보니 개인 식사를 하려면 이유를 공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예외적인 경우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끝나고도 상사분들과 함께 회식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리를 피하는 게 어려웠는데 전남친은 자주 서운해했다. 나도 이미 피곤한 상황에 전남친을 달래야 하는 일이 늘어나니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많이 피곤했다. 나는 점차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미 이때 전남친과 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애초에 생활 방식이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내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면 타인이 나를 이해해 줄 거라는 방식으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편이지만 전남친은 그런 사정이 있더라도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걸 들어주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만나서 원동력을 얻어 일도 더 잘 해내고 싶어 연애를 시작했지만 날이 갈수록 일도 사랑도 모두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촬영이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만나는 걸 티 내지 않았으니 헤어진다 해도 알 사람은 얼마 없었지만 내가 전남친을 불편해할 게 걱정됐다. 또, 전남친이 어떤 사람인지 확신도 없으니 헤어지고서 어떻게 나올지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이때 내 마음은 관계를 끝내고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벌써 머물러있었지만 내 선택에 자신이 없었다. 촬영이 끝나고서 헤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결정을 미루면서 그전까지는 그래도 노력하면 서로 맞춰갈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애써 합리화시켰다. 사실은 맞춰간다 해도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알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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