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_06
첫 공연을 올리기까지 정말 다사다난했다. 오디션을 보고 배역을 준비하던 어떤 배우는 역할이 마음에 안 든다며 연습 도중 잠수를 타버리기도 했다. 나는 또 그 배우를 연습에 돌아오게 하겠다며 연습이 끝나고 피곤한 상태인데도 통화를 하며 설득하기도 했다. 공연이 올라가기도 전에 잡음이 들리는 상황들이 내겐 너무나 스트레스였다.
무대, 의상 스태프들 역시 잘 알고 지내던 후배들로 구성되어 있어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결과적으론 내 기대를 저버리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3학년 연극 공연이 제일 일찍 끝나기 때문에 빨리 털어버리는 걸 목적으로 일을 대충 해치우거나 연출인 내가 모르게 각 팀 헤드들이 골머리를 앓게 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내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 당시에는 내 연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 업무라고 생각해서 그걸 하나하나 다 해결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이미 배우들과의 마찰도 잦은 상황에 온 스태프들을 챙기고 있으니 체력이 남아날 리 없었다. 그때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방법은 친구가 생일 때 선물해 준 비타민 담배를 피우는 거였다. 니코틴이 없어 흉내내기에 불과한 물건이었지만 이대로면 얼마 안 가 담배를 피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나는 그때, 2학기때는 교환학생을 갈 생각이라 교환학생 면접을 준비하며, 학점을 유지하기 위해 전공 시험 및 복수 전공을 하던 강의들의 학점까지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돌아보니 내가 그때 교양 수업을 듣던 강당에서 공황 발작을 느끼게 된 게 예정된 일처럼 느껴진다. 하나도 포기하지 않겠다며 매달리느라 놓치게 된 건 결국 내 건강뿐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시간은 흐른다. 공연을 잘 올리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그만큼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도 컸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되고서 공연을 올리는 날, 고등학교 친구들이며 가족들이 보러 왔다. 특히나 가족들한테는 내가 하는 일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거라서 많이 떨리기도 하고 잘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예체능을 하려고 할 때 엄마랑 갈등을 빚었었기도 하다 보니 그만큼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연이 올라가기 전까지도 너무 초조했지만 다행히 꽤나 완성도 있게 보였다. 속을 썩였던 배우들도 관객들이 있는 무대에 올라가니 연습한 거에 더해 본능적으로 더 깊은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가며 그날 공연이 끝난 뒤 처음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매일매일 무대를 보며 수정할 부분 피드백은 하겠지만 사실 연극의 경우 무대를 완성시키는 건 배우의 몫이라 연출이 공연 기간 중 더 덧붙일 부분이 적기 때문에 공연이 시작되면 연출의 일이 마무리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저녁 공연까지 끝내고는 이제 정말 후련한 마음으로 가족들을 보러 갔다. 어땠냐고도 물어보고 고생했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스태프가 내게 오더니 분장실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무슨 일이지 싶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분장실로 가보니 배우가 누워있었다. 커튼콜을 앞두고 무대에서 내려오던 여자 주인공이 계단에서 미끄러져 허리를 다친 것 같다고 했다.
정말 정신이 아찔했다. 이게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이미 구급차를 부른 상황이었고 병원으로 옮겨지면 내가 응급실로 따라갈 예정이었다. 사실 냉정하게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그 배우가 더블캐스팅이라 대체 배우가 있었다면 내가 그리 걱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마가 낀 것처럼 몸이 안 좋아 친구를 내보내야 했던 그 배역의 배우가 다친 거라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다른 배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응급실로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에선 어떡하지? 그 생각만 맴돌았다. 이대로 공연을 접어야 하나? 나 말고 배우들은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근데 그래도 아직 상황은 모르니까 괜찮을 수도 있지 않을까? 수많은 질문들을 뒤로하고 일단 병원에 갔다. 응급실에선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만 골절이라기보다 허리를 삐끗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일단 배우는 상황을 보기 위해 병원에 머물고 내일 다시 경과를 알려주기로 했다.
응급실 앞 벤치에서 정말 엉엉 울었던 것 같다. 왜 나한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지? 그동안 그렇게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공연날까지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연출을 하지 말라는 뜻인가? 너무 슬프기도 했지만 무섭기도 했다. 내가 몇 달간 준비한 이 공연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끔찍했다.
지도 교수님은 여느 때처럼 그 자리에 없었고 뒤늦게 달려온 학과장은 모든 탓을 내게 돌렸다. 사실 다른 배우들의 말처럼 다친 배우는 무대에서 조심하지 않아 실수로 다친 부분이 컸다. 하지만 학과장은 이 공연을 어떻게 책임질 거냐며, 지금 울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연출은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 동선을 다 알고 있는 너가 무대에 서든지, 당장 내일 공연을 취소하든지 해라. 일방적인 말들을 쏟아내며 나를 몰아세웠다. 나는 참다 참다 내일 배우가 상황 알려주기로 했으니 기다려보겠다고 했다.
학과장이 몰아세우며 언급하던 그 연출도 다친 배우와 같이 학과장의 학생이었고 고작 23살이었다. 지도 교수도 없이 온갖 잘못을 떠안기에는 많이 어렸고 경험이 부족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으로 연출을 배우기 시작했던 그 학교의 학과장이 세계의 주인인 줄만 알고 그 말을 철석같이 믿어버렸다. 연출은 감정적이어선 안된다. 그날부터 나는 내 감정을 죽여버렸다.
배우들이 기다리는 학교로 돌아가 상황을 공유하고 내일 한번 더 체크해보자고 말했다. 갑자기 분장실로 달려갔던 딸을 보며 엄마도 걱정했지만 나는 엄마에게까지 감정을 숨겼다. 어차피 지금 누군가 도와줄 수 없으니 슬픔과 불안을 쏟아내는 것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오로지 나 혼자서 이 상황을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다행히 배우는 진통제를 맞고 무대에 서기로 했다. 폭풍이 지나간 다음에야 등장한 지도교수님은 배우가 무리하지 않도록 최대한 앉아있는 방식으로 동선을 수정했다. 연습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연을 30분 뒤로 늦춘 뒤, 우리는 남은 시간 동안 바뀐 동선으로 연습을 반복했다.
남은 기간에는 다행인지 사고가 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일이 내게 오랜 시간 동안 영향을 미칠 거라는 걸 이때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감정을 받아주지 않는 엄마를 만나고, 감정을 느끼는 게 잘못된 거라고 말하는 교수를 만나며 나는 내 감정을 느끼는 일이 잘못된 거라고 믿게 됐다. 누군가 내게 함부로 대할 때 드는 불쾌한 감정마저도 나는 그 감정을 의심하며 다른 사람이 공감해줘야만 내 감정을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