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력이 흐려질 때

트라우마_04

by 김물꽃

바닷가 주변에서 촬영이 있던 어느 휴차날, 전남친은 바다를 보러 가자고 내게 연락했다. 왠지 오늘 그 사람이 나한테 고백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레는 마음보다는 고백을 거절할 생각으로 알겠다고 답했다. 친구로 남든 관계를 끝내든 어서 이 애매모호한 관계를 정리하고도 싶었다.


둘만 만나는 건 처음이었는데 예상대로 그 자리가 불편하고 어색했다. 설렘에 따른 긴장보다는 사람 자체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전남친은 나와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사람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 내가 말수가 없고 차분한 성격인 건 맞지만 그건 어른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화가 나도 조심성이 많아 표현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남친은 나를 착한 사람, 얌전한 사람, 순수한 사람 등 자신이 만들어둔 틀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대화할 때마다 나를 틀에 가두려는 게 느껴져서도 답답함이 있었지만 이걸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관계를 정리할 거니까.


바닷가에서 전남친은 혼자 설레는 모습을 보이며 내게 거리를 좁혀왔는데 그럴수록 나는 경계를 세웠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결혼이나 아이에 대한 이야기도 오고 갔다. 나는 애초에 엄마아빠의 파탄난 결혼 생활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로망이 없었고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은 가진 적이 없었다. 전남친은 그런 내 이야기를 들으며 그럴 수도 있다며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로망을 펼치는 사람이었다. 대화할수록 결이 맞지 않다는 생각에 잘 거절해야겠다는 생각만 점점 커졌다.


고백을 할 거란 예상은 했었지만 아주 불쑥 내게 자기감정을 고백했다.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한 것도, 나를 좋아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나대로 친구로서의 감정 그 이상은 없다고 이야기했다. 여자친구가 있으면서 나한테 이러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아예 사귈 생각도 없는데 여자친구와 헤어지라고 말하는 게 내 자격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나 말고 누구의 입장을 더 배려했던 걸까.


전남친은 내 뜻을 존중하기보다 자신의 감정을 밀어붙였다. 고백하는 순간에는 나를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감정이 없다는 말에 그럼 키스해보자며 자신의 넘치는 감정만 내보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더 부담스러워 계속 거절했고 끝끝내 타협으로 더 생각해보고 답을 하겠다고만 정리가 됐다.


이후 나는 다시 정신없는 일상을 보냈다. 매일 이슈가 터졌고 나는 하루하루 뒷수습을 하느라 바빴다. 전남친을 생각할 겨를 없이 멘탈이 나가있었고 그 과정 역시 나는 혼자서 버텨야 했다. 외롭고 불안한 날들이 이어졌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점점 전남친의 연락에 마음을 기대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서있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힘들 때 불쑥 찾아와 비타민을 주고 간다거나 촬영이 끝나고 불러내 산책을 한다거나 내 연락에 반응해주는 전남친이 내게 버팀목이 되었다. 연락을 이어가지만 이제는 전남친 프사에 있는 여자친구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관계를 지내는 걸 여자친구는 알고 있을까? 전남친이 말한 대로 그분 역시 헤어지기를 바라고 있을까? 내가 합리화하는 건 아닌가? 전남친은 죄책감을 느낄까? 외로운 순간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었지만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게 불쾌했다. 이번엔 제대로 이야기해볼 시간이었다.


고백에 답할 생각은 아니었다. 난 여전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그냥 생각 없이 만나기에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애초에 말이 많이 도는 사내연애를 좋아하는 편도 아닌 데다가 막내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그 일이 방해받는 것도 원치 않았다.


전남친을 만나서는 이런 상황들을 이야기했다. 조금씩 설레는 거 같지만 나는 여자친구의 존재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전에는 설렘 자체가 없어서 지나갔지만 이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한다고. 전남친은 미안하다거나 나를 이해한다며 수긍하기보다는 변명하기 바빴다. 오래 만나고 전화로 헤어지는 걸 보면 나한테도 좋을 게 없다며 그 관계는 자기가 잘 정리할 테니 만나보자고. 나는 먼저 정리하고 오면 생각해보겠다 했지만 전남친은 기회를 놓칠세라 그 기세를 몰고 갔다.


나는 그 연애가 처음이었다. 연애에 대한 조급함이 내 판단력을 흐렸다. 그 순간 이번 제안을 거절하면 확실히 전남친과의 관계는 정리되겠다고 느꼈다. 정말 좋은 사람과 연애하겠다며 신중했던 나는 그 순간 그냥 가볍게 한번 만나봐도 나쁠 거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연애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 말처럼 그냥 가볍게도 만나볼 수 있지 않나 싶었다. 안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안 만나는 것보다 나쁘다는 건 연애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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