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_08
나도 전남친을 사랑한 때가 있었다. 맞지 않는 많은 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헤어지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골절 포스팅에서 구체적으로 이어가겠지만 나는 작년 영화팀에서 일하다 뼈가 부러지는 일이 있었다. 촬영 중 일어난 사고로 발생한 일이었다. 엄지발가락이 부러지는 바람에 촬영은커녕 운전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난 늘 뭔가를 증명해내듯 조급하게 살았었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 날에도 괜히 내가 멍청해서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할까봐, 다쳤다고 농땡이 피운다고 생각할까봐 병원에 가지 않았다.
공휴일이었기 때문에, 세트장에서 촬영하는 마지막 날이라 마무리까지 해야 하는 바쁜 날이었기 때문에 내 발을 신경 쓸 시간이 없다 생각했다. 모든 일이 끝난 다음 가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처음으로 뼈가 부러져본 거라 내가 골절이 된 건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 아픔은 참아도 될 거라 넘겨짚었다.
사실 이 사고는 다른 스태프의 부주의로 발생한 사고였다. 때문에 탓을 하자면 그분의 잘못으로 몰아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이 미안해하고 아파할까봐 내 고통을 숨겼다. 절뚝거리며 다시 현장에 합류했고 여기저기 다친 발가락으로 걸어 다녔다.
그때 전남친은 나중에서야 이야기했지만 나를 다치게 했던 그 스태프한테 화가 났었다며 내가 다치고 나서 세트장을 돌아다니는 동안 내 연락을 모조리 씹고 지나다니며 나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의 분노도, 그 무심함도 모두 내가 자초한 일이라 자조하며 그 부당한 일들을 모두 감내했다.
무튼 그날 나는 부러진 발가락으로 절뚝거리며 세트장 마무리까지 매듭지었다. 그러는 동안 다친 부위는 극심하게 아파왔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괜히 다친 걸로 일을 대충 한다 생각할까봐 오히려 누가 볼 때면 더 열심히 걸어댔다. 골절된 엄지발가락으로 운전해서 숙소까지 돌아갔으니 참 지금 생각하면 나 자신이 나한테 제일 가혹했다.
숙소로 돌아갔을 때 팀원이 양말을 벗어보라 말했다. 내가 다친 걸 의심하는건가? 나도 내 상처를 의심했기 때문에 그런 피해의식과 함께 양말을 벗었다. 피멍이 엄지발가락 전체를 뒤덮어 흉측한 꼴이었다. 당장 다음날 병원에 가기로 했다.
병원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은 실금이 갔다며 많이 아팠을 거 같다고 했다. 말이 실금이지 가장자리에 있는 뼈가 부러져 중심이 되는 뼈가 동떨어져 있었다. 반깁스를 해야 할 거라는 말에 나는 정말이지 극도의 불안함과 자괴감을 느꼈다. 내가 이만큼이나 아팠구나 하는 걱정보다는 이제 나는 이 팀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돼버리는 건가? 이대로 집에 돌아가야 하나? 내 존재에 대한 실망을 느꼈다.
어떻게든 이 팀을 끝까지 해내고픈 욕심이 있었다. 무얼 위해? 지금 질문한다면 모두 부질없게 됐지만 이 팀을 끝까지 함으로써 내가 무언가를 잘 버텼다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리고 연이 닿으면 팀원들과 다음 작품에서도 함께 일하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나는 골절이라는 말대신 실금이 갔다는 말로 내 상처를 최소화시켜 전달했다. 반깁스는 사실 돌아다니지 않을 걸 감안한 수단이었겠지만 언제든 풀 수 있다는 걸 장점인 것 마냥 모래바닥 돌바닥을 모두 걸어 다녔다.
현장이 끝자락이었기 때문에 다친 사람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는 것도 어려웠다. 오히려 일손이 모자라 팀을 나눠 일할 때 나도 내 몫을 해내야만 했다. 아픈 티를 내지도 않으니 모두가 잘 버틴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그걸 자긍심이라 오해하며 사람이 없을 때면 반깁스를 한 다리로 거의 뛰다 싶이 현장을 누볐다. 다른 스태프가 농담 삼아 너 이거 말고 다른 작품 안 할거야? 말했는데 내가 독하다는 칭찬으로 이해하는 식이었다.
다쳤다고 일을 빠진다는 눈치를 주는 사람에겐 오기로 보여주려고 독하게 굴었다. 내가 반깁스를 했음에도 무거운 짐을 옮기는 부탁을 하는 스태프들에겐 내가 다쳤든 말든 모두 각자의 입장이 중요하지 그 사실을 다시 인지하며 내 존재를 증명해내기 위해 무리한 일도 내가 직접 해내려고만 했다.
내가 끝까지 버텨내고 싶다는 말에 전남친은 그래도 올라가는 게 좋겠다며 내게 자신의 감정들을 털어놨다. 사실은 그때의 난 내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줄 내편이 필요했지만 촬영이 끝나고 전남친을 만날 때면 내가 전남친을 위로해주고 달래주는 상황이 이어졌다. 한 번은 그날의 사고에 대해 내 잘못들을 찾아내는 전남친의 말에 너무 서운하고 속상해서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여기서 버텨내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다. 그동안 고생했던 걸 모두 수포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다친 나를 이렇게라도 붙잡아두는 팀원들을 생각해 먼저 돌아가고 싶다고 말을 꺼내는 게 어렵기도 했다. 지나고 나면 모두 추억이 될 이야기라 합리화하며 버텨내고 있었는데 나를 이해해주길 바란 사람마저 내 잘못을 찾아내고 있으니 많이 서운했다.
전남친은 다그치려던 게 아니라며 미안하다 했지만 그 이후에도 그런 핀잔은 종종 이어졌다. 싸우는 것도 지쳐 대부분 나는 그런 추궁에 모두 내 탓이요 하며 다 받아들이려고만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크랭크업 3일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