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타가 오는 순간

트라우마_09

by 김물꽃

다치고 한 1주가 지났을 때 몸에 점점 무리가 왔다. 애초에 반깁스를 하고 오래 걸어다니니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팅팅 부었다. 처음에야 짐정리도 같이 하고 현장 업무도 봤지만 다친 몸으로 일하다보니 계속 어중간하게 일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상사에게 말해 조언을 구했다. 집으로 올려 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상사는 내게 새로운 업무를 제안했다. 촬영지를 알아본다는 일명 로케이션 서치인데 직접 현장을 방문하기 전 로케이션 장소를 데스크 업무로 찾아보는 일이었다. 촬영 스케쥴에 맞출 수 있는지, 공간은 어느 정도인지, 사운드 적으로나 촬영에 방해되는 요소는 없는지 등등을 알아봐야 한다. 촬영 일정이 꼬이며 급하게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말로만 들으면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이지만 리스트업 된 게 따로 없는 장소였기 때문에 촬영 컨셉을 생각하고 대강의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곳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은근 까다로운 업무였다. 데스크 업무를 보더라도 우리는 무조건 현장으로 출근하기 때문에 스케쥴에서 제외받는 일은 없었지만 그나마 현장에 돌아다니는 일을 줄일 수 있어 체력적으로는 부담이 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할 일이 주어졌다는 기쁨이 컸다. 이 팀에 필요한 사람이 된 거 같아서 감사했다.


이 일은 처음 해보는 업무였기 때문에 모르는 것도 많고 자신도 없었지만 그걸 핑계 삼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며 내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해 처음이지만 잘 해내고 싶었다. 전국에 있는 여러 장소들에 전화하며 정보를 얻고, 다시 상사에게 컨펌받으며 새로 알아볼 정보들을 수정하는 식으로 일을 해나갔다. 현장업무를 안본다고 눈치를 받아도 지금은 내 담당 업무가 있으니 심적으로 위축되는 게 덜했다.


결과적으론 장소를 잘 찾아내 내가 알아본 로케이션이 선택되었다. 수고했다며 상사의 칭찬도 받게 되었다. 다친 상황에서도 내 몫을 해냈다는 생각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다는 사실이 면죄부가 되고 싶지 않아 내가 찾은 장소가 선택되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진짜 그 일이 실행되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모든 걸 불태운 후였다.


새로 할 수 있는 추가적인 일을 찾는 것도 지쳐버렸다. 애초에 팀에 합류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도 나는 갑자기 그만둔 팀원의 일을 넘겨받으며 일명 땜빵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일하는 내내 나의 열등감으로 자리하기도 했는데 원해서 다친 게 아닌 이 상황에도 계속해서 뒤처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물론 이전까지는 그 역할들도 어쨌든 같은 팀에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 묵묵히 하자 마음먹었었지만 점점 내게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더 근본적으로 제작팀 업무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버텨내고 있었다. 그때 내가 있던 현장은 촬영 장소와 베이스캠프의 거리가 멀었다. 이전 로케이션과는 달리 현장 근처에 있지도 않으니 나는 베이스에 회계팀과 머물러야 했다. 회계팀 방에 찾아가 부수적인 일들을 도왔다. 나름대로 할 일을 찾은 거였다.


촬영이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회계팀 업무를 도우며 나름의 소속감도 다시 회복하면서 잘 버텨내고 있었다. 이제 정말 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버티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흔들리던 멘탈은 결국은 깨져버렸다.


이미 다치고서도 2주가 지난 상황이었다. 현장 업무를 줄였다고는 하나 사실상 스태프들은 내게 부탁들을 해왔고 베이스에 있는 제작팀원이 나뿐이라 그 요구를 넘기기도 참 애매했다. 그러다 보니 몸 상태가 점점 악화됐다. 병원에 가보고 싶어도 시간을 내는 게 어려웠다.


이미 우리 스케쥴은 끝을 향해 질주하는 상황이라 휴차날도 보이지 않았다. 지역에서 지역으로 이동하는 이동 휴차가 유일했다. 이동 휴차 때는 사실상 짐을 모두 옮겨야 하기 때문에 제작팀은 그날이 더 바쁜 날이었다. 나는 운전도 할 수 없으니 결국 누군가와 함께 동행해야 하는데 내 병원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다면 그 눈총을 받는 게 더 괴로울 거 같았다.


스케쥴이 빡세지 않은 날을 잡아 상사에게 병원을 한번 다녀와도 될지 물었다. 스케쥴에서 딱히 이슈가 없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이동휴차 전에 부탁을 드려본 거였다. 종종 내 몸걱정을 해줬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히 그 부탁을 들어줄 거라 기대했던 거 같다. 하지만 상사는 자신이라면 다음 로케이션에서 병원을 갈 거 같다며 에둘러 거절했다. 사실상 만약에 갈 경우를 말한거지 촬영 끝나기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참으라는 의견이었다.


내가 뭘 기대한거지 한 번의 현타가 왔다. 다른 누구의 설득이 아니라 내가 아프기 때문에 내 권리를 더 주장해도 괜찮았을 텐데 나는 이미 지쳐있었다. 내 아픔을 누군가에게 증명해내야 하는 상황도 너무 피곤했다. 그냥 머릿속에 있던 어떤 끈이 하나 잘려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이트 촬영이 다가왔다. 나이트 촬영은 해가 진 다음에야 시작해 해가 뜰 때 끝이 난다.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회계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회계팀은 보통 하루종일 회계업무를 봐야 하기 때문에 나이트 촬영 스케쥴대로 일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까지는 자리를 지키다 퇴근을 한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현장 베이스에 혼자 남게 됐다.


많이 공허했다. 더욱이 그날은 특수효과 이슈가 있던 날이라 모두가 그 촬영을 준비하러 가있었고 베이스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새벽 시간에 회계팀 방에 혼자 남아있으니 잠도 왔지만 어쨌든 업무 시간이라 잠을 잘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덩그러니 앉아있는데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싶었다. 아무 의미 없이 끝까지 버티는 게 정말 나한테 의미가 있는 걸까 많이 고민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만둔다고 해도 내가 어쨌든 다친 몸이기 때문에 하차가 정당화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끝을 내지 못한 건 내가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해줄 거라 그렇게 또 순진한 기대를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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