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무너진 날

트라우마_10

by 김물꽃

나이트 촬영 후 휴차가 생겼던 날 팀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 가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혼자 가겠다고 했지만 전남친이 나를 걱정하며 병원까지 데려다줬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많이 떨렸어서 전남친과 같이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몰라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아무 이상 없다고, 2주 정도 지나니 뼈가 좀 붙었다고 하면 얼마 안 남은 촬영을 다 버텨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뼈가 더 벌어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갔던 병원에서 찍었던 사진과 비교하니 골절 부위가 늘어나 있었다. 더 아팠던 게 꾀병이 아니었다는 걸 눈에 보고 나니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가뜩이나 부러진 부분이 관절 쪽이라 초반에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관절염처럼 계속 아프게 될 수도 있다는 선생님의 걱정 어린 충고를 들었다. 정말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려놓을 순간이 찾아온 거 같았다. 촬영 종료까지 며칠이 남았고는 이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아깝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려운 시기들을 다 버텨내고 갑자기 생긴 사고로 하차해야 한다는 게, 어찌 됐건 내 의지로 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다.


혼자 타지에 나가 일하는 딸을 걱정할까 엄마에게도 아프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다쳐서 올라가야 할 거 같다는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직 벌어지지 않은 상황들까지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병원을 다녀와 밥도 먹고 카페도 가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편안해질 리 만무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점점 그만두려는 결정으로 기우는 내 이야기를 전남친은 잘 들어줬다. 물론 내 편이 있다는 거에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전남친은 처음 다쳤을 때부터 올라가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이야기했던 사람이라 내가 겪는 어려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도 생각했다.


다친 사람도 나였고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사람도 나였지만 그때의 난 나 대신 누군가 결정을 통보해주길 바랬다. 내 상황에 대해 끝도 없이 고민하면서도 정작 결정을 내릴 용기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하고서도, 분명 내가 선택한 결정인데 전남친이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냈었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이 앞으로 계속 아플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떠올리며 어딘가에 탓을 돌리고 싶어 했다.


어찌 됐건 이제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하고, 정말 그 마음을 받아들이니 눈물이 났다. 5개월의 시간이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거 같았다. 나 역시 끝의 끝을 함께 마무리하며 축하받고 싶었다. 그 순간들을 벌써 잃어버린 거 같아 많이 속상했다. 그랬기에 만약에라도 상사에게 말했을 때 또 다른 제안을 준다면 나는 또 그대로 따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막상 정말로 돌아간다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사실 올라가는 과정은 완전히 어그러지고 말았다. 상사에게는 개인적으로 말을 꺼낼 생각이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꼬여버렸다. 숙박을 담당하는 팀원이 다음 장소에서의 숙박을 물었을 때 혹시나 나 때문에 일을 두 번하게 될까 걱정해서 그만두게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버린 것이다. 상사에게는 아직 말 못 했는데 따로 말하려고 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론 상사에게로 이야기가 새어나가 버렸다.


상사 입장에서는 일방적인 통보가 되었을 거라 어찌 됐건 이미 기분이 상한 상태였을 거다. 팀원에게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연락이 왔다. 상사에게 말이 전해졌다고도 미리 언급해줬고 식사 자리에도 같이 자리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차로 이동할 거리는 아니라 걸어서 5분 10분 정도가 소요되는 곳이었다. 사실 반깁스를 하고서 어딘가 걸어 다닌다는게 일단 피곤한 일이라 대충 거절하고 싶었지만 마무리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을 떠올리니 이미 마음이 아팠지만 즐겁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가자마자 나는 상사의 자리에 불려갔다. 정말로 불려갔다는 말이 맞다. 상사와 팀원, 팀장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불려가 한두 시간 정도 붙잡혀있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이미 상사는 더 윗분들에게 스케쥴 문제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후였다. 갔을 때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보였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내 몸상태가 더 안 좋아졌고 아무리 데스크 작업을 한다고 해도 현장에 나가있으면 사람들은 체력 쓰는 일을 부탁하기 때문에 몸이 더 악화될 수밖에 없을 거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미 오래 참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체력적으로 무리라는 판단이 되었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상사는 일하다 보면 다치는 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뼈가 부러져 본 적 없냐고 물었다. 이 정도도 못 버틴다니 내가 온실 속 화초 아니냐며 나를 비난하기도 했다. 병원에서의 상태를 말했지만 그런 정신이었으면 여기 이 자리에도 오면 안 되는 거였다고 내 말을 막았다. 제대로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오게 됐다고 말했지만 이미 나에게서 마음을 돌린 상태였다.


사람들이 부탁하는 일을 거절할 수 없다면 당장 내일 병원에 가서 반깁스가 아닌 통깁스로 바꾸고 목발을 받아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여주기라도 하면 사람들도 내게 일을 안 시키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정말 속에서부터 하고 싶은 말이 튀어나왔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며. 진짜 내 몸을 위한 처방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치장이, 이도저도 아닌 일을 하며 자리만 지키는 게 상사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인가 싶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제작팀 일에 대한 환멸이 났다.


그동안 내 몸을 걱정하던 건 그냥 보여주기 식이었나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이 팀에서 그냥 끝까지 사용되어야 하는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기보다는 일종의 기계 부품처럼 느껴졌다. 내 감정과 몸상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상사에게는 그렇게라도 자리를 버티는 게 중요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아니었지만.


돌아보면 그때 상사는 나하고 대화할 생각은 아니었던 거 같다. 내가 그만두려는 사실에 속상해서 붙잡으려는 의도로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라 추측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폭격들을 들으며 내 정신이 육체를 떠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상사에게는 들리지 않는 거 같았다. 아니,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잘못한 사람이 되어야 했고 무조건적으로 상사에게 잘못했다고 빌고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남겠다고 말해야만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내 몸상태를 아무리 호소해도, 그동안의 내 노력을 증명하려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모든 의지가 꺾여버렸다. 상사가 화풀이를 다 해내고서 다른 자리로 가서 밥을 먹으라 했지만 이미 식욕이 떨어진 후였다.


다른 테이블에 있던 다른 팀원이 무슨 일이냐 물어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을 때 상사에게 이야기를 전했던 그 팀원은 몰라도 된다며, 물꽃이가 멍청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대신 답했다. 모든 일이 내가 멍청해서 벌어진 일이라니. 너무 간단하게 정리해버린 그 모욕에 나는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나도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그 비난을 모두 받아들여버렸다.


철저히 상사의 편이던 그 팀원은 숙소로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내게 일방적인 이야기를 해댔다. 상사는 한번 돌아서면 무서울 만큼 차가운 사람이라며 남은 날이라도 내가 죽도록 열심히 해야만 겨우 상사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며 경고했다. 내가 아프건 말건, 일을 하다가 발가락이 분질러지든 나중에 못쓰게 된다고 한들 이 작품은 끝까지 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모두 체념해버렸다. 반격에 대한 의지도 상실해버렸다.


그날 밤 나는 많이 무너졌다. 혼자서 일어서는 법을 아직 몰랐던 그때, 바닥까지 내려가버린 나였지만 그런 나라도 지킬 수 있었던 건 전남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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