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인 내 편

트라우마_11

by 김물꽃

돌아보면 상사와 함께 했던 그 식사 자리에서 나는 공황상태였던 거 같다.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느껴졌고 많이 무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텅 비었고 정신이 육체를 떠나가는 것 같았다. 그냥 나는 여기서 끝날 때까지 남아있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정말 지옥 같다. 그렇게 느껴다.


식사 자리에 가기 직전 전남친과 통화하며 상사와 잘 정리하고 오겠다고 씩씩하게 말한 터라 지금 이 기분으로 연락하는 게 더 내키지 않았다. 사내연애라는 게 이런 점에서 참 안 좋다고 생각했다. 서로가 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으니 내가 수모를 겪었다 한들 우리 팀을 다 아는 사람에게 털어놓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여기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게 많이 쪽팔렸다.


전남친에게는 덤덤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복도 계단에서 몰래 전화하며 그냥 이야기가 잘 안 됐다고, 아마 크랭크업 까지는 여기 머물러야 할 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덤덤한 척해도 무너진 감정이 다 새어 나왔을 거다. 난 사실 그렇게 무너진 순간에는 틀어박혀 혼자 끙끙 앓는 편이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힘들 당시에는 잘 털어놓지 못하는 편이라 나는 그 정도만 이야기하고 혼자 울다 들어갈 생각이었다.


전남친이 당장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 분명 그 사람을 보면 울기만 할 텐데, 감당하지 못할 감정들을 다 쏟아낼 거 같은데 그런 걱정들이 앞서 오지 말라고 말렸다. 전남친은 내가 많이 걱정된다고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이 찾아오고 내가 겪은 일들을 남의 일마냥 읊어댔다. 이미 기력이 다 빠져 내게 남은 선택지는 그냥 이대로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골절 부위가 더 벌어지든 말든 나중에 관절염으로 더 아프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냥 촬영이 얼른 끝나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전남친이 찬찬히 나를 달랬다. 그 사람들이 다 잘못된 말을 한 거라고. 네가 여기서 얼마나 열심히 했고 노력했는지는 자기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알 거라고. 정말 너를 아끼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라고. 본인만 해도 내가 여기서 얼마나 버티고 싶어 했는지 다 알지만 내 몸과 건강이 우선이라 생각해서 집으로 올라가라 말했던 거라고. 하지만 내가 남길 바라니 그걸 응원했던 거라고.


내 편이 필요했던 많은 순간들이 있다. 아무리 내가 옳은 결정을 내려도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고 나는 많이 흔들렸다. 겉으로는 강한 척 상처받지 않은 척 나를 보호하며 씩씩하게 굴었지만 속으로는 문드러지는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간절하게 빌었다. 나를 믿어줄 한 명만 있어준다면 다 괜찮을 거 같다고. 혼자서는 너무 무섭고 외롭다고. 그 외로움이 무서워 더더 나를 드러내지 않게 된 나였다.


그런 나한테도 내 편이 생긴 순간이었다. 온갖 모진 말들을 듣고서 속이 문드러진 내게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이 다 나빴다고. 너를 정말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거라고.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들어주는 전남친이 그 순간 정말 너무나 고마웠다. 나도 내 편이 아니었던 그 상황에서 전남친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 말들을 들으며 떠나갔던 정신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차근차근 나를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이 바로 내가 전남친과 싸움을 반복하면서도 헤어지지 못했던 이유였다.


이대로 촬영날까지 더 남아있는 건 내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상사와 같은 작품을 못한다거나 하는 불안함은 나중의 일이었다. 내가 먼저 신경 써야 할 건 내 상태였다. 이미 어그러진 상태로 꾸역꾸역 눈치 보며 일한다는 게 나한테 더는 못할 짓 같았다. 상사와 다시 차분히 이야기해보고 제대로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전남친이 아니었다면 회복하지 못했을 상황이었다.


식사 자리에 가기 전보다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일 상사와 다시 이야기해보고 그래도 잘 안 풀린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든 잘 이야기해본다면 식사자리에서와는 다르게 흘러갈 수 있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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