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_12
상사와는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따로 약속을 잡아둔 게 아니라 여느 때처럼 콜시간에 맞춰 나갈 준비를 했다. 출근하려고 숙소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팀장님은 어제의 식사 자리를 이야기하며 깁스를 하고 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일단 현장에 나가고 상사에게 물어본 뒤 병원에 다녀오려 했다고 하자 일단 숙소에서 대기하다 확인되면 현장으로 나오라 말하곤 먼저 촬영장소로 떠났다.
숙소에서 기다리며 상사에게 연락했다. 혹시 아침에 시간이 되면 이야기 좀 나누자고 말했다. 싸우려는 것도 아니었고 어제보다는 나도 정리된 상태라 더 침착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해 없이 지금 상황에 대해서만 차분하게 다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상사가 전날 식사 자리에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뱉은 건 사실이지만 많은 순간 내 편을 들어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일하는 동안 여러모로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상사도 그걸 알고 있었고 아마 내가 끝까지 잘 해내길 바래서 상사 입장에서는 배신감에 더 못되게 말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랬기 때문에 그동안 좋았던 기억들이 너무 많기에 끝을 이렇게 나쁘게 매듭짓고 싶진 않았다.
상사가 1층으로 내려오고 어제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침착하게,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자꾸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상사에 대한 서운함 보다는 상황이 이렇게 내 마음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거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꾹꾹 눌러 담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사 입장에서는 갑작스레 통보하는 걸로 보이니 당황하고 실망했을 거 같다고. 그걸 이해하지만 나는 갑자기 말했다기보다 몇 주에 걸쳐서 오래 고민하다 말하는 거라고. 가벼운 선택이 아니었다고 바로 잡았다.
어제보다는 차분해진 분위기 덕분인지 상사 역시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자신이 봐왔던 나를 알고 있으니 내가 그리 쉽게 결정하지 않았을 걸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전날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을 때 상사는 많이 화를 냈다. 나는 그 말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고 싶어 우리가 하는 일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생각한 게 아니라 정말 뭐가 더 우선이 되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워서 그 말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상사는 그 말 역시 이해한다고 말했다. 어제는 화를 내긴 했지만 사실은 자신도 나도 둘 다 틀린 게 아닐 거라고. 일하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고 서로가 생각하는 게 달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한다고. 상사는 우리 팀에서 제작팀으로 오래 일할 거 같은 사람으로 나를 꼽았었다. 일하면서 많은 실수를 했어도 촬영이 끝나갈 무렵 가고 싶은 작품이 있냐며 내게 자신이 아는 팀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만큼 나를 많이 믿어줬던 분이다.
그랬던 사람과 끝을 이야기하는 이 상황이 조금 슬펐다. 다친 게 꼭 내 탓만은 아닌데도 이렇게 벌어진 상황이 많이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달라져야 했다. 상사와 이야기하며 오해는 풀었지만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상사는 일단 병원에 가서 깁스를 하고 오라며 나를 병원으로 보냈다.
택시를 타긴 했지만 반깁스를 한 상태로 돌아다니는 게 쉽진 않았다. 하필 엄지발가락이 부러졌다보니 오른발에 아예 힘을 주기가 어려워서 거의 한 발을 들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무튼 병원에 도착해서 깁스를 하려고 하니 반바지를 입고 와야 된다고 말했다. 겨울 촬영을 이어가던 중이라 초여름이 될 때까지 반바지가 없었다보니 주변에서 사와야 했다. 물론 입고 간 옷을 찢을 수도 있었지만 깁스로 바꾼 후 다시 갈아입을 걸 생각하면 애초에 반바지로 갈아입는 편이 나았다.
병원에서 나와 주변 마트까지 절뚝절뚝 걸어갔다. 그 꼴로 마트를 돌아다니다 옷가게에 들러 반바지를 구입했다. 직원분께서 짐도 들어주고 편의를 봐주셨다. 자신도 얼마 전 골절된 적이 있어 불편할 걸 안다며 나를 안쓰럽게 봐주셨다. 혼자서 버텨내던 내가 밖으로 나와 따뜻한 시선을 받으니 그 시선 한 번에 눈물이 터질 거 같았다.
병원으로 돌아가서 깁스를 만들었다. 모두 처음 경험해보는 거라 낯설었지만 마음이 뒤숭숭해서 그런지 사실 깁스 자체에는 별 생각이 안 들었다. 잘 때나 씻을 때는 벗을 수 있었던, 그나마 걸어다닐 때에는 가벼웠던 반깁스에서 벗어나 더 무거워진 깁스를 달고 있으니 이게 뭐 하는 건가 더 현타가 왔다. 상사는 꼭 깁스에 목발까지 하고 오라고 말했고 혼자서 병원에 갔던 나는 그 모든 게 짐이 되었다.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가는데 안부를 물었던 스태프에게 연락이 왔다. 그냥 지금 깁스하고 현장에 가고 있다고 말하자 집으로 올라가면 건강 잘 챙기라는 말을 해줬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대답하는데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ㅎㅎ.. 택시에서 사연 있는 사람처럼 눈물을 계속 흘리다 기사님에게 휴지를 받아 들고는 소리 없이 눈물만 닦아냈다.
점심시간쯤 현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베이스에 가장 몰려있을 때 사람들의 관심 속에 택시에서 내렸다. 손에는 목발과 짐이 주렁주렁. 발은 깁스로 바뀌어있으니 웃픈 시선들이 느껴졌다. 상사에게 도착했다고 연락을 남겼고 이렇게는 안되겠다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상사는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고 지금 말을 붙이기도 뭐해서 기다렸다가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끝난 뒤 상사는 촬영 장소로 돌아갔고 나는 그쪽으로 움직일 수도 없어 베이스에서 계속 그를 기다렸다. 올라갈 걸 생각해 남아있던 데스크 작업을 하나씩 마무리했다.
촬영 내내 나를 많이 챙겨줬던 식사를 담당해주시는 사장님이 밥은 먹었냐며 도시락 접시에 식사를 담아 내게 건네주셨다. 식욕이 없어 굶을 대로 굶는 중이었지만 거절할 수도 없어 받아만 들어놨었다. 데스크 작업을 하다 기력이 다 떨어져서 사장님이 담아준 식사를 먹는데 또 울컥 올라왔다. 걱정해주신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해서 가장 맛있게 먹었던 식사였던 것 같다.
혼자서 계속 작업하고 있다 피디님을 마주했다. 깁스를 하고 처음 뵙는 거였는데 안쓰러운 마음을 이야기하시다 크랭크업까지만 일하고 추가촬영에는 참여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 건강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해주신 거였다. 그러다 내 표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대로 집으로 복귀할래? 그렇게 물어보셨다. 피디님은 나를 따로 방으로 데려가셨다.
나는 사실 겁이 났다. 모두가 여기서 버텨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내가 이걸 버티지 못하면 그냥 실패가 되는 거 아닐까. 많이 무서웠다. 피디님은 그런 내게 뭐가 더 우선인지를 말해주셨다. 피디님은 그런 분이었다. 촬영하는 동안 다른 스태프들의 건강을 유난히도 챙기시던 피디님이 어떤 때는 유난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 대상이 되어보니 기계부품처럼 느껴지던 내가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너무 일관된 피디님의 모습에 그 말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집으로 올라가고 싶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골절이 더 벌어져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고. 다만 상사와 이야기하고서 정리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피디님은 알겠다고 고생했다고 말해주셨다. 그 대화가 내겐 정말 큰 힘이 됐고 많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