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나를 짓누를 때

트라우마_13

by 김물꽃

사실상 지난 포스팅에서 말했듯 갈등을 겪었던 당사자들과는 사실 나름대로 이야기가 잘 풀렸다. 내가 더 괴로움을 겪었던 건 예상치 못한 사람의 예상치 못한 태도 때문이었다.


깁스를 하고서 현장에 나타난 나는 상사와의 대화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비난한다 한들 그만둔다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겪어왔던, 그리고 앞으로 겪을 수많은 갈등들을 떠올리며 내가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온통 그 생각에만 몰두해있었다. 그런 상태일 때 제작팀 내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가 내게 연락을 했다.


둘 다 현장에 있긴 했지만 친구는 촬영지에 있어야 했고 나는 베이스에 있었다 보니 안부를 물을 겸 전화를 건 거였다. 친구는 상태를 묻다 어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친구는 전날 식사자리에는 자리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았고 내가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만 미리 해둔 상태였다.


아마 그 친구는 나를 통해서 전해 들은 이야기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이야기들을 들었던 것 같다. 전날 상사가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했는지, 다른 팀원은 왜 공격적으로 이야기한 건지 내게 설명해주려했다.


하지만 그때의 난 이미 해질 대로 해져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모든 말이 나에 대한 비난으로 들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미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미안한데 지금 내가 상사와의 대화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고, 또 이게 잘 풀려서 올라갈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계속 촬영에 남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이 대화 먼저 끝내고 그 말을 듣겠다고.


친구는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고만 말했다.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다고. 사실 그 이상으로 더 설명할 말이 없었지만 자기 말만 하고 끊어버리니 더 설명할 기회도 없었다. 그대로 그 친구의 일방적인 무시가 시작됐다.


종종 그때를 떠올릴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까? 내가 힘들어 죽어가면서도 그 친구의 말을 먼저 들어줘야 했던 게 맞는 걸까? 하지만 돌아볼수록 그때의 나는 아주 솔직했다. 내가 가진 피해의식을 모두 털어놓으며 지금은 그 말을 듣는 게 너무 힘들다고 고백했었다. 아직 상사와의 대화도 제대로 끝나지 않았으니 이 대화가 끝나면 그때 이야기를 듣겠다고.


애초에 내가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건 친구가 아닌 상사 때문이었다보니 괜히 친구에게 그 감정을 쏟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괜한 이야기들로 친구와 감정을 상하지 않기 위해 내 입장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던 거였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친구는 나를 얼마나 배려했던걸까 싶다.


친구 역시 다쳐서 한동안 촬영에 돌아오지 못했던 때가 있다. 돌아오기 싫어 엄살 부리는 거라는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 나는 그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에 연락을 주고받으며 상태가 안좋은 거 같으니 더 쉬고 오라며 상사를 설득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뒤바뀐 그때, 친구는 내 상황과 내 감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듣기 싫다고 무시한 것도 아니었고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것도 내가 아니었다.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건 바로 그 친구였다. 그 친구도 아마 내가 떠나는 게 아쉬워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친구의 입장을 짐작만 할 뿐이다.


상사와의 이야기는 촬영이 모두 끝나고도 한참 뒤에야 이뤄졌다. 촬영을 이어오던 그곳을 마무리하고 다음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해서 정신이 없긴 하지만 대화조차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상사는 전에도 다른 사람의 퇴사를 앞두고 계속 대화를 피한 전적이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도 대화할 틈을 주지 않는 상사를 나는 묵묵히 기다렸다.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사장님이 그동안 고생했다며 제작팀을 위한 식사를 준비해주시기로 했다. 그걸 기다리는 동안 잠시 틈이 생겼고 상사와 대화를 나눴다. 생각해봤지만 더이상은 체력이 안될 거 같다고 내일 모두가 이동하는 날에 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피디님도 권했지만 일단 상사와 먼저 대화하고 결정하겠다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상사도 짐작했을 거다. 아마 그래서 대화를 더 피한거였겠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자 알겠다고 답했다. 몸조리 잘하고 올라가서 상태 괜찮아지면 알려달라고 그렇게 말해줬다. 나름대로 잘 마무리되었다 생각했다.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이게 된 건 그 친구였다. 촬영 마무리하는 동안,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 친구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왕따를 당하는 것 마냥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다 잘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해되지 않는 태도에 억울함이 있었지만 이해하려 노력했다.


다음날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 상사와의 대화가 늦게 이뤄지는 바람에 팀원들에게는 제대로 올라간다 말할 틈이 없었다. 위에서 정리해주는 말도 없었고 이대로라면 현장에 나가 마무리를 더 돕다가 가야 했다. 사실상 몸을 제대로 쓸 수 없으니 또다시 덩그러니 자리만 지키다 가야 할 꼴이었다. 계속 이렇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불편한 사람들을 마지막까지 마주하며 감정을 학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책임감이 없다고 욕한다 한들 마지막은 내 식대로 하고 싶었다. 팀장님께는 전날 올라가게 되었다는 말을 미리 했지만 오늘 현장에 가기 전 올라가도 되는지 물었다. 팀장은 자신이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그 불편함을 견디며 가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팀장님은 촬영장소로 이동해야하니 괜히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이 나는 부모님 차를 타고 올라가겠다고 이야기했다.


팀원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친구에게도 따로 연락을 했다. 미안함이 없었지만 그동안 그래왔듯 내가 그냥 이해하면 되겠지 싶어 이유 없는 사과를 했다. 물론 그 친구는 그 답장까지도 모두 무시했다.


부모님께 처음으로 다친 사실을 알렸다. 다쳐서 올라간다는 말을 하는 그 상황이 많이 괴로웠다. 나를 데리러 와달라는 말이 참 억지로 뱉어내는 말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부모님이 도착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슬펐다. 부모님 앞에서도 감정을 티 내지 않는 편이라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꾹꾹 눌러 담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 낯설기도 했지만 비로소 혼자 방에 들어와서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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