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_14
크랭크업 전날, 나보다 먼저 촬영을 그만둬야 했던 다른 팀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촬영장을 방문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지만 지금은 찾아가기 어려울 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서로 아쉬워했지만 추가촬영만큼에는 꼭 복귀하고 싶었다.
촬영이 끝나고 일주일 뒤면 바로 추가 촬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내가 촬영지를 구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누구보다 더 참여하고 싶었다. 갈등이 많았다고는 하나 추가촬영에 다시 합류해서 마무리짓는다면 내가 잃은 것들을 모두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단톡에서는 여러 말들을 오고 갔지만 친구에게 외면당했던 그 상처가 두려움으로 남아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회복이 우선이었다. 병원에서 조금이라도 뼈가 붙었다고 한다면 깁스를 반깁스로 교체하고서 당장 촬영에 나갈 생각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전남친은 그저 신나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부터 계속 나를 불러낼 생각인 전남친에게 내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밖으로 나가면 또 걸어다닐 수밖에 없는데 추가촬영에는 꼭 나가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집에서 좀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전남친은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자꾸 미안한 사람이 되었다. 내 몸을 챙기겠다는 모든 상황에서 나는 계속 죄인 같았다. 나대로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들이 많았지만 모든 감정을 혼자 앓았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쏟아내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는 모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며 나보다도 그를 달래주기 바빴다.
결국 회복 중에 그를 만나러 가야 했고 통깁스를 한 상태로 절뚝거리며 그와 돌아다녔다. 그의 사랑과 내 사랑은 참 많이 달랐던 것 같다. 불편한 몸으로 그를 만나고 있으니 머릿속으로는 계속 현타가 왔다. 몸도 마음도 계속 지쳐갔다. 내가 왜 이렇게 추가촬영을 가고 싶어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아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와 틀어진 이야기도 자연스레 나오게 됐다.
사실은 전남친과 나보다도 먼저 친분이 있던 게 친구였다보니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 했다. 또, 친구와 풀 건 나였으니 괜히 우리 둘의 갈등으로 전남친까지 영향받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남친이 그리 사려 깊은 편은 아니다보니 내가 틀어졌다는 걸 안다면 친구에게 괜한 이야기를 꺼내 우리 둘의 갈등을 더 악화시키는 건 아닐지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나는 그 걱정들도 돌려말하며 내가 직접 그 친구와 해결할테니 친구에게는 괜한 말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상황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록 회복될 기미가 없었지만 일주일 만에 뼈가 붙는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추가촬영 바로 전날 병원에 들렀을 때 아직 깁스를 푸는 건 무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절망스러웠다. 내가 다쳤던 순간을 곱씹게 됐다. 돌아볼수록 억울하고 속상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분노가 치밀었다.
추가촬영의 경우 대부분이 넓은 공간을 활용하는 거였기 때문에 통깁스 상태로 돌아다니기엔 무리였다. 내 몸에만 무리가 가면 버틸 생각도 했지만 몸도 안좋으며 자리를 차지 하는게 다른 팀원에게 더 폐가 될 거 같았다. 특히나 추가촬영 스케쥴이 더 빡빡하게 진행되는 만큼 모든 사람이 효율적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에 내가 도움이 될 거 같진 않았다. 다시금 포기를 배워야 했다.
병원에 간 날은 사무실에 들러 노트북을 반납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원래 계획으로는 반깁스로 교체하고서 당당하게 팀원들을 만나 좋은 소식을 알리려고 했었지만 별 수 없이 나는 다시 불참한다는 소식만 전해야 했다. 전남친은 전날 자신이 데려다주고 싶다며 술에 취해선 별소리들을 떠들어댔지만 결국 병원엔 찾아오지 않았고 사무실에서 일이 끝나면 연락 달라고 했다. 내게 했던 말들도 기억 못하는 거 같았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애써 나를 달랬다. 죄지은 거 아니니까 당당하게 들어가자. 그렇게 나를 연기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상사는 장난처럼 안부를 묻고는 건강을 잘 챙기라고 말해줬다. 피디님은 회복 잘하고 쫑파티라도 꼭 오라고 말해주셨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보니 그 친구가 생각나기도 했다. 촬영하는 동안에도 자주 싸웠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친구는 이미 다른 스태프에게 내 이야기를 하며 서운함을 잔뜩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추가촬영을 못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다 스태프가 내게 그 친구 이야기를 전했다. 이야기인즉슨 내가 자신에게 미리 말도 안 하고 올라간 게 서운했다는 거였다. 이미 올라간다는 소식을 전했었고 마지막으로 인사할 때까지 나를 무시한 건 그 친구였다. 스태프의 변호에 억울함이 많았지만 내가 다 이해하려 했다.
스태프는 그 친구도 아마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먼저 연락해보라 했다. 내 입장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더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나를 합리화하며 친구에게 연락을 남겼다. 추가 촬영 앞두고 나는 못 가게 되었다고. 바쁠 텐데 마무리 잘하고 쫑파티에서 다시 이야기해보자고. 미안함을 지어내 사과를 남겼다. 그때는 그 친구에게서도 답장이 왔다. 내가 내 입장만 생각하는 거 같았는데 조금은 이해할 거 같다고 쫑파티에서 보자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