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_15
사무실에 방문했던 날 형부와도 처음 만나기로 했다. 언니의 결혼을 앞두고 매번 만나려고 했지만 내가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느라 겨우 보게 된 날이었다. 전남친은 사무실에서 식사자리로 이동할 때 데려다주겠다며 나를 보러 왔다.
식당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는 동안 전남친에게도 추가촬영은 가지 못할 거 같다고 이야기했다. 기운이 다 빠진 상태였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어서 많이 속상했다. 하지만 그 속상함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전남친은 마냥 신나 있었다.
제작팀과 친분을 이어가는 걸 마음에 안들어했던 만큼 제작팀끼리의 모임이 드디어 끝난다는 생각에 후련해했다. 그저 나와 놀러 가기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상황이 마무리되고 다른 날에 그 여행 이야기를 꺼냈으면 장단에 맞춰줬을지 모른다. 하필 그날은 내가 병원에서 아직 회복되려면 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이었고 사무실에서 사람들을 만나 추가촬영에 합류하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를 전달한 날이었다.
상황이 괜찮아지고 가면 안되겠냐는 말을 했다. 여행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해대자 전남친은 서운함을 계속 토로했다. 나도 더 참을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다치고서부터 계속해왔던 여행 이야기였지만 내가 다친 건 안중에도 없다는 그 태도에서 배려가 느껴지지 않았다. 상황을 설명하려고 전에 있었던 일에 덧붙여 내 감정을 설명했다. 예전 일을 꺼내와 이야기하는 내가 최악이라며 화를 냈다.
사람이 많던 그 카페에서 모멸감이 느껴졌다. 언성을 높이며 정확히 최악이라는 워딩을 사용해 나를 함부로 대하는 그 모습에 정이 떨어졌다. 나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도 있구나 새삼 신기하기도 했다. 내 기분이라도 가라앉히려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다 말하는데 깁스를 하고서 절뚝거리는 내 모습이 참 초라했다. 조금 뒤면 형부가 될 분을 처음으로 만나러 가야 하는데 이 기분으로 괜찮을까 싶었다.
대충 마무리하고는 식사자리로 갔지만 기분이 안 좋아 술을 마시겠다니 어쨌느니 카톡을 보내니 자리가 편할리 없었다. 내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의 기분을 모조리 표현하는 그 모습이 너무 어리게 느껴졌다. 형부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전남친의 술에 취한 전화를 받았다. 속상하고 서운하다며 자신의 감정을 모두 내 탓으로 돌리는 그 모습에 점점 지쳐갔다.
정말 헤어지고 싶었다. 답답하겠지만..ㅎㅎ 정말 이때의 난 내 기분이나 상태보다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게 먼저였어서 추가촬영을 앞둔 전남친에게 이별을 고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또, 일을 그만둘 때 힘이 되어줬던 그 순간에 내게 크게 남아있어서 헤어지자 말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전남친은 추가촬영에 가야 했어서 그전에 기분을 풀어줘야겠다 싶어 만나자고 했다. 이때도 그는 자기 혼자 내가 헤어지자 말할 거라 예상했는지 만나서 내내 툴툴거렸다. 육아를 한다는 마음으로 그 투정을 받아줬다. 내가 그의 감정까지 모두 감당하려 했다. 상황을 정리하고 대화를 하는데 전날 술에 취해 전화를 걸었던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 없이 시작된 추가촬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전남친의 연락을 받았다. 다른 사람의 가십이 되고 싶지 않아 그렇게까지 숨기려 했던 사내연애였지만 나와 사귄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말을 전하며 미안하다던가 하는 입바른 사과도 아니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으니 자기 책임이 없다는 말투가 실망스러웠다.
나와 사이가 틀어진 그 제작팀 친구하고도 싸우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자기 딴에는 친구와 괜히 엮일까봐 거리를 뒀다고 하는데 그걸 보고 친구가 나 때문에 거리를 두냐며 서운하다고 몰아세웠다고 했다. 설명을 하려 해도 친구는 전남친을 무시하니 점점 싸움이 과열됐고 내가 어렵게 마지막을 이야기했던 상사 앞에서 이 싸움을 벌여졌다는 소리에 정말 환멸이 났다. 친구도 전남친도 모두 각자의 입장을 너무나 이기적으로 내세우는 그들에게 정이 떨어졌다.
그냥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것들을 풀어가야 할지 모를 일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엮인 문제만큼은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친구와 전남친의 갈등을 알게 됐어도 친구하고 나는 쫑파티에서 다시 이야기해보기로 했으니 일단은 그걸 믿으려고 노력했다.
쫑파티날 나는 마주하기 싫었던 그 모든 사람을 만나야만 하는 자리가 너무 불편했지만 꼭 들르라고 이야기 해준 피디님과 다른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친구 하고도 잘 풀어보려고 정말 큰 용기를 냈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시원한 해결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