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남기는 한다
내가 면허를 딴 건 27살 때의 일이다. 성인이 되고서 바로 따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스무 살 때를 생각하면 일단 재수학원을 등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극장에 붙들려 일만 했으니 면허를 딸 시간이 없었다. 더욱이 주변에도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지 운전할 일도 없고 차도 없으니 딱히 면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다 드라마 제작사에 지원했을 때에도 사실 뽑힐 거라는 기대를 하지 못했던 건 운전 때문이었다. 제작팀의 필수조건 중 하나가 운전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속일 수는 없으니 애초에 이력서에도 적었지만 면접에서 다시 한번 말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대표는 괜찮다고 말했다.
우연찮게 제작사에 들어가고서 따지자면 기획 업무를 맡아 일하게 됐다. 작가님들의 대본을 넘겨받아 검토하고 수정 방향을 담은 피드백을 제출하는 일이었다. 기획팀 말고는 현장에 직접 나가는 제작팀이 있었다. 우리 회사는 스타트업 느낌의 회사였지만 타 회사와 협업하는 식으로 일이 돌아가서 그 당시 면허가 있던 다른 팀원이 제작업무를 맡게 됐었다.
그곳이 바로 내 운전면허가 시작된 곳이다. 사실은 기획팀에게 내어주는 회사 차량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라 운전이 필요 없기는 했다. 하지만 대표와 팀장이 어느 순간부터 압박하기 시작했고 몇 안 되는 제작팀원들은 한 명씩 과제처럼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평일에는 왕복 3시간 거리의 회사를 다녔고 주말에는 단편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글도 내가 쓰고 연출도 내가 하는 거였다 보니 회사 가기 전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거나 회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스태프들과 소통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일정이 빠듯하다 보니 사실은 면허를 딸 시간이 부족하긴 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시뮬레이션 학원을 다니는 거였다.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면 그곳에서 필기를 제외한 모든 시험을 끝낼 수 있다는 거야 알지만 그때 나는 처음 시도해보는 제작일과 아직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연출 일을 모두 포기할 수 없어 다 잡고 싶었다. 그리고 운전보다는 당장의 단편 영화가 더 소중했기 때문에 운전면허는 대표와 팀장에게 내보일 수 있는 면허증만 발급받는 거에 더 급급했다.
우리 회사는 따로 휴가가 없었고 야근과 잔업이 일상이었다보니 면허를 준비하기 위해선 주말을 활용해야 했다. 시험은 양해를 구하고 평일에 치러 가는 식이었다. 나는 단편 영화를 준비하면서 또 시간을 내어 시뮬레이션 학원에 시간을 끊어두고 놀이기구 같은 기계를 활용해 운전을 연습했다.
매 시험이 긴장됐던 건 탈락 그 자체보다는 탈락할 경우 다시 평일에 시간을 빼달라고 양해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인 분위기여도 그 부탁이 어렵기야 하겠지만 그때 다녔던 회사는 거의 조폭에게 혼나는 느낌으로 다녔던 강압적인 회사였다보니 그런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겁이 났다.
필기시험은 어플을 활용해 간간히 공부한 게 전부였는데 다행히 합격을 받았다. 시험 문제가 워낙 복불복이긴 하지만 내가 치렀던 시험은 정확한 수치를 요하는 그런 문제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사실 답을 고르면서 불합격에 대한 걱정이 있었지만 가까스로 통과했다. 대부분이 그렇듯 필기는 그냥 어플로 모의고사 몇 번 풀어봐도 괜찮은 거 같다.
기능 시험은 다른 이유에서 긴장이 됐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시뮬레이션으로만 운전 연습을 했다보니 진짜 차를 운전하는 건 시험 현장이 처음이었다. 그 때문에 학원에서 정말 혹독하게 연습했다. 처음 연습하던 때를 떠올리면 무슨 공식 외우듯이 암기했던 거 같다. 오른쪽 두 번 왼쪽 한번 뭐 이런 식? 주차할 때 어깨선까지 오는 걸 보고 그다음 핸들을 꺾어야 된다는 공식을 달달 외웠다.
시뮬레이션에서 연습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학원에서 사용하는 기계 차량은 핸들을 놓으면 원래대로 돌아간다. 선생님은 그 점을 짚어주며 시험 보다가 어떤 사람은 핸들을 몇 바퀴 돌렸는지 까먹기도 한다고 말했다. 기능시험을 직접 치르면서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탈락하면 회사에서 깨질 상황을 떠올리니 초집중이 됐다. 아무 벌점 없이 잘 가다가 주차할 때 바로 그 실수를 했다. 애초에 뭔가 애매하게 들어가버리기도 했지만 핸들을 몇 바퀴 돌렸는지 까먹어버리니 이걸 만회하려다 탈락할 거 같았다.
기능시험을 보러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 선생님이 몇 가지 팁들을 알려줬다. 그중 하나가 주차할 때는 시간제한이 있으니 감점을 막으려고 실격될 바에야 점수를 깎이더라도 시간 안에 넘어가라는 말이었다. 그 순간 딱 그 말이 떠오른 덕분에 나는 그냥 감점을 받으면서 바로 탈출했고 다행히 합격을 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도로주행. 사실 도로주행 코스는 정해져 있다보니 시뮬레이션으로 연습해도 괜찮았다. 다만 이건 정말로 내가 도로에 나가서 운전을 해야 하는 거라서 직접 차로 움직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해도 평일엔 회사를 다니고, 주말엔 단편영화를 준비하는 내가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결국 시험 하루 전날에만 아빠에게 부탁해 3시간? 4시간 정도 코스를 연습했다.
연습할 만한 차가 아빠의 suv 아니면 언니의 경차였는데 차라리 작은 게 낫다 싶어 경차로 연습을 했다. 처음엔 아빠가 코스를 돌아주고 그다음엔 내가 직접 운전하며 몸으로 익혔다. 다들 그렇지만 나 역시 초보였다보니 시야 자체가 좁아서 아슬아슬하게 운전을 이어갔다. 애초에 그리 오랫동안 진짜 자동차로 연습하는 게 처음이라 더 애를 먹었다.
그리고 시험 당일. 도로주행은 보통 두 사람이 팀이 되어 한 사람이 먼저 하고 뒷사람이 타고 있다가 돌아가는 코스를 하게 되지만 나는 운이 좋게 혼자 탑승하게 됐다. 코스 자체는 시험 직전까지도 유튜브를 보며 달달 외웠기 때문에 모든 코스를 대강 외우고 있었다.
옆에 감독관님이 타고 출발하는데 정말 여러 번 고비가 있었다. 도로주행 역시 경험 자체가 적다보니 아슬아슬하게 시험을 이어갔는데 다행히 실격 요소는 없었어서 합격을 받았다. 다만 감독관님이 시험이 끝나고 연습 많이 하셔야겠다며 조언을 해주셨다.ㅎ..
회사에서 시달리던 것 중 하나는 드디어 끝냈구나 싶어 많이 후련했다. 가장 먼저 회사에 알렸고 회사 사람들도 축하해줬다. 대표 역시 앞으로 종종 회사차로 연습해보라며 응원해주기도 했다. 면허를 발급받은 게 금요일이었고 월요일날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게 코미디이긴 하지만..ㅋㅋㅋ 무튼 돌아보면 덕분에 면허를 따게 됐었다.
아마 그런 압박이 없었다면 면허를 따는 일은 더 미뤄지지 않았을까 싶다. 악몽 같던 회사였지만 면허증처럼 뭐라도 남는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