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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2025년 3월 14일 금요일

by 쿙가

한국어도 안 쓰면 까먹는다. 방크(Bank)라는 독일 단어를 처음 알게 됐을 때 그 단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머릿속으로 그 뜻을 계속 되뇌었다.


"방크는 영어로 은행이고 독일어로는 벤치야. 벤치는 독일어로 방크고, 독일어로는 방크가 은행이기도 하고 벤치이기도 하지. 벤치와 은행이 동음이의어라니 참 안 어울려. 방크에 방크를 놓으면 웃기겠다. 저기 저 방크 건물 앞에 방크가 있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벤치를 보면 방크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게 되었다. 몇 년 후 길을 걷다가 '저기 쓸데없는 곳에 방크가 놓여있네.'라고 생각했고 방크는 영어로 벤치인데 한국어로는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혼자 심각해졌다. 속상했다. 한국어도 이렇게 쉽게 까먹는데 독일어와 영어는 어떤가 싶었다. 잠시 후에 영어로 벤치가 한국어로도 벤치라는 것을 스스로 기억해내고 나서, 언어는 안 쓰면 잊히는 거라는 걸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야 하며 쓸데없이 억울해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내 독일어 최고 전성기는 지금이 아니라 삼 년 전이었다. 독일어 공부를 이 악물고 했고 한국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팀 사람들은 다 독일인이라 평일에는 독일어만 썼다. 아침마다 그날 하루를 대비하기 위해 늘 독일어 책을 최소 십 분간 소리 내서 읽고 출근을 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어느 한 번은 일 하다가 업무적으로 어이없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서 혼자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면서 독일어로 구구절절 궁시렁댔다. 사실 별거 아닌 일이라 내 앞에서 일하던 독일인 동료는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있었고 마침 그때 지나가던 한국인 법인장님이 신기하다는 듯 "쿙가씨 독일어 이렇게 잘하는 줄 몰랐네요"라고 말했다. 그 시절 나는 영어는 한 마디도 못 하던 시절이었고 내가 독일어와 한국어 둘 다 못하는 동료들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라는 걸 법인장님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영어를 못해도 독일어를 하니까 겨우 버티면서 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어쨌든 법인장님 앞에서는 이 무슨 당연한 이야기를, 훗, 하고 넘겼지만 나는 그때 그 순간을 두고두고 간직하면서 종종 우쭐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문제는 그다음 회사로 이직한 후였는데 면접까지 독일어로 봐서 들어갔는데, 막상 들어가서 보니 독일어를 못하는 동료들이 한가득이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팀 회의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매일매일 간담이 서늘했다. 그렇게 일이 년을 보내고 나니까 독일어로 말하는 게 어색해졌고 심할 때는 두세 문장을 이어서 말하면서 더듬거리다가, 어느 순간 영어가 더 편해진 탓에 영어만 쓰면서 독일어가 가능하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이번에 새로 옮겨간 팀에서는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에 있는 고객들과 통화를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지금도 많다. 고객한테 전화가 오면 처음에는 은근슬쩍 영어로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말해봤는데 매번 다들 독일어 가능하냐고 물어오길래 그냥 내가 다시 독일어를 공부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금요일 오후,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때 내가 좀 말을 차분하게 잘한 것 같아 뿌듯했다. 보통 전화가 오면 고객이 무엇에 대한 문의를 하려는 건지 레퍼런스 번호를 주고 무슨 문제가 있다거나 도움이 빨리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럼 나는 그 번호를 가지고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찾아야 한다. 보통 고객들은 내가 사람인 걸 쉽게 잊어버린다. 나한테 레퍼런스 번호만 알려주면 모든 대답이 나한테서 바로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데, 그 기대를 아주 부드러운 방식으로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내 머릿속 업무 처리과정을 하나하나 조곤조곤 읊어주어야 한다. "네에, - 멜버른에서 로테르담으로 오는 화물인거죠? - 컨테이너가 2개구요. - 오늘 중으로 배가 도착예정인 컨테이너가 아직 하역되지는 않았네요. - 릴리즈 요청은 이미 하셨고요."


지금 팀에서 일하기 전에는 우리 회사에 이렇게 많은 시스템과 내부 웹이 있다는 걸 몰랐다. 조금 복잡한 케이스인 경우에는 중얼거리기를 멈추고, "잠시만요, 이 케이스는 확인해야 할 부분이 많네요."라고 하면 다들 알았다고 하고 차분히 기다린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에 통화를 한 고객은 '이렇게 좋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면 몇 시간도 듣고 있을 수 있다'라고 아주 정중한 목소리 톤으로 장난을 치길래 나도 비즈니스톤에서 복식호흡으로 넘어가 "아학핳ㅋㅋㅋ 감사합니다핰ㅋㅋ"하며 친한 사람들한테 말하듯 웃어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이날 독일어 발음이 좀 깔끔하고 문장도 술술 잘 나왔다. 이날은 흥겨움이 넘쳤다.


고객이 분기탱천해서 거는 전화도 꽤 있다. 이미 화가 난 상태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분명 금액을 송금했는데 왜 아직 홈페이지에는 요금이 지불되지 않았다고 뜨냐고 물어본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게요. 한국에서는 계좌이체하면 일초만에 돈이 도착하는데 독일은 왜 며칠씩 걸리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진짜 답답함'이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된다. 그래서 '오 그러시군요. 언제 계좌이체하셨나요? 독일에서는 계좌이체하시고 나서도 저희 회사 계좌로 돈이 들어와서 확인이 되기까지 며칠은 걸리더라고요. 대신 송금확인증을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저희가 검토하고 바로 시스템에 업데이트해 드릴 수 있어요. 이메일 주소 알려드릴까요?'라고 말한다. 그럼 고객은 알겠다 하고 전화를 끊고, 나는 아무 잡생각 없이 오늘도 독일어로 문장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고 넘어갈 뿐이다.


언어를 배울수록 세상은 넓어지지만 새로운 언어로 깊이 있게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수준의 언어능력이 요구되는 것 같다. 대학생 때 한국어만 할 수 있던 시기에는 무언가를 배울 때 깊이감은 있었지만 다채로움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대학교에서 독일어 수업을 들으면서 문법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던가 하고 생각했을 때, 영어랑 똑같은 알파벳을 조합해서 만든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독일어 소리가 계속 듣고 싶어 졌을 때, 겨우 그거 하나로 내 좁은 세상을 조금 넘어선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독일어를 하고 또 하고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고 영어도 못하면 문제가 되는 근무 환경에 처하고. 지금 외국어 수준으로는 스몰톡을 하면서 낄낄거리거나 업무와 관련해서 대화를 하는 정도로 가능하다. 이것도 너무너무 감사하지만 깊이 있는 대화가 너무 그립다. 이제는 넓게가 아니라 깊이감을 더하고 싶어졌다. 한국어를 쓰는 나는 생각하고 고로 존재하는데 외국어를 쓰는 나는 그냥 오늘 하루에 무엇을 했고 어떤 이메일을 받았다는 사건의 나열로만 이뤄지는게 너무 아쉽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일어와 영어 둘 다 안고 가는 건 너무 힘든 것 같다. 매번 슈피겔(Spiegel, 독일 시사 잡지)을 읽을까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영국 시사 잡지)를 읽을까 고민하다가 둘 다 안 읽는다. 두 외국어의 대치상태를 아주 오랫동안 겪고있다. 독일에 사니까 독일어를 외면할 수 없고 영어는 영어니까 안고 가야 한다. 그래서 독일어를 느슨하게 풀어줄 생각이다. 그냥 방치하면 서운하니까 독일어로 딸 수 있는 제일 좋은 어학자격증을 딴 후에, 세상 공부는 슈피겔이 아닌 이코노미스트로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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