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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25년 3월 16일 일요일

by 쿙가

융진과 혜온이 친해진 이래로 일주일에 한 번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게 됐는데, 글을 써 오는 건 혜온뿐이다. 이번 주만 해도 나와 융진은 단톡방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고 혜온이 늘 그랬듯 언제 시간이 되는지 물어왔다. 혜온은 독일에 다녀간 뒤로부터 꾸준히 글을 쓰고 있어서 우리는 늘 안부인사를 먼저 주고받고, 그 후 혜온이 자기가 써 온 글이나 시를 읽어주고 나면 그에 대해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눈다. 주말마다 줌으로 만나는 이 글쓰기 모임은 대부분 비슷하게 흘러가는데 나는 글을 써 오지 않은 이유를 매번 새로운 이유를 들어 설명하면 나머지 둘은 그 장황한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들어준다. 융진은 심지어 단 한 번도 글을 써오지 않았는데 우리 셋다 서로서로 부담 없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거라서 그러려니 한다.


오늘 내가 당당히 말한, 글을 써 올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손으로 쓰는 일기 때문이다. 에세이를 써서 책을 내고는 싶지만 당장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일기장에 쓰기도 바쁘기 때문에, 지나간 일들을 브런치에 올릴 시간 따윈 없다. 게다가 나는 일기장에다가 손으로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을 적는 걸 좋아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적는 걸 좋아한다. 한국을 떠나면서 지금까지 쓴 일기장만 열 권이 족히 되기 때문에 만약 에세이를 쓴다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에세이를 쓸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죽고 난 후 누가 내 일기장들을 모아서 나에 대해 써줄 거라고 말하고 나니 융진이 아이디어를 냈다. 지금까지 쓴 일기들을 사진을 찍어서 챗지피티한테 에세이를 써 내놓으라고 하는 게 어떻냐는 거였다.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 나에 대해 쓰는 것보다는 내가 살아있을 때 챗지피티한테 쓰게 하고 검토하는 게 낫다고 하는데 원래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터무니없이 들리는 법이지만 어쨌든 둘 다 어처구니없는 말이라 그냥 내가 직접 에세이를 쓰기로 했다.


일기는 맨날 쓰면서 브런치에 쓰는 걸 망설이는 이유는 내가 글에 한해서는 아주 멀리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최소 이백 년은 살고 싶은 나는 자꾸만 오백 년 후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먼 미래 지구인들이 나의 이야기를 역사적 고증자료로 혹은 이 시기를 살았던 실존인물의 대서사시 정도로 여길 거라는 부담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기는 막 휘갈겨 써도 공공연하게 출판할 예정인 글은 조금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올해가 시작된 뒤로 벌써 반이나 써 버린 일기장을 뒤적거리면서 뭐 브런치에 올릴만한 글이 없을까 살펴봤다. 2025년 2월 1일 토요일, 일기장에다가 '오전 9시에 혜온/융진과 글쓰기 모임을 하는데 다들 내 글이 너무 재밌다고 극극찬을 해줘서 기분 좋아서 브런치에 Einbürgerungstest 에세이 올리고 내친김에 시험분석 글까지 티스토리에 3개나 써서 예약 걸어놨다 ㅋㅋㅋ'라고 적어놨다. 이런 자투리 같은 순간들을 챗지피티가 에세이로 써봤자, 물론 나보다 잘 쓰겠지만, 그래도 나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사람이 기록한 것을 남겨야 한다는 아날로그적 책임감이 있다. 게다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은 글 쓰는 순간에만 느껴지는 뇌가 팽글팽글 돌아가는 느낌. 그리고 우리 엄마랑 아빠도 안 챙겨보는 내 글들을 중학교 친구 하나와 고등학교 친구 하나가 잘한다! 잘한다! 하며 한없이 칭찬해 주는 모습. 이 두 가지이다. 그래서 내 글은 내가 써야 한다.


내 머릿속에서 나는 이미 유명인사라서 글 하나 업로드하는 게 굉장히 조심스럽다. 늘 퇴고에 심혈을 기울인다. 발행하지 않은 글만 수두룩하다. 글이 너무 오글거리지는 않을까, 자기애에 너무 빠져있지는 않을까, 혹은 피해망상에 가득 차 있거나 멍청해 보이지는 않을까 한참 생각하다가 그래도 적어도 두 명은 읽으면서 꺌꺌 거리겠지 싶었다.




그 후 융진의 카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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