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49.9 Myxoid Liposarcoma

Episode 44 | 항암 후 일년

by 기암

세포독성 항암을 하면 약에 의해 온몸의 세포분열이 강제로 제한되면서 신체 여러 곳에 증상이 나타난다. 머리가 빠지고, 입안이 헐고, 백혈구와 적혈구 수치는 떨어진다. 대부분은 회복된다.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이 걸리지만 결국 정상으로 돌아온다. 이 중 가장 오래 몸에 남아있는 것이 손발톱의 항암 자국이다. 손톱은 반년 정도, 발톱은 거의 1년이 걸렸다.

항암을 하는 동안 손발톱의 세포분열도 영향을 받아 얇게 형성된다. 항암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자라지만, 다음 항암이 시작되면 또 반복된다. 총 6번의 항암을 했으니, 정확히 6개의 띠가 손발톱에 새겨졌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무의 나이테 같기도 하다. 항.암.테.

얼마 전 발톱을 깎다가 마지막 항암테를 잘라냈다. 손톱의 그것은 이미 다 자라 잘려나간 지 오래지만, 발톱은 오래 걸렸다. 거의 1년.


그렇다. 항암을 마친 지 (에피소스 33 참고) 1년이 다 되어 간다. 1년이라는 시간은 길면서도 짧다. 일상으로 완벽히 돌아왔고, 아프기 전 그대로다. 회사에서는 있던 자리 그대로 돌아왔고, 아내와는 더 돈독해졌고, 아이들은 각자의 미래를 향해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그 사이 네 번의 이미징 팔로업이 있었고, 매번 롤러코스터 같은 드라마가 펼쳐졌다.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았을 테지만, 경각심을 잃지 말라는 것인지, 단 한 번도 쉽게 넘어간 적이 없었다. 그래도 매 고비는 false positive로 무사히 지나갔다. 전이도, 재발도 없음을 어렵게 확인할 때마다 나의 재발률은 조금씩 내려간다. 0으로 수렴하는 어떤 수학 함수 같다. 이렇게 5년이 지나면, 나쁜 소식이 없다면, 0에 닿겠다 싶다. 완전관해를 향해 한 발씩 다가가고 있다.


암환자로 살기 위해서는 지키고 관리해야 할 것들이 많다. 건강하게 먹고, 매일 운동하고, 스트레스 없이 생각해야 한다. 생활습관을 180도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항암을 막 마친 초반에는 그게 어렵지 않았다. 치료의 고통과 암의 두려움은 뼛속까지 박힌 오래된 습관들을 단번에 무력화시킨다.

바뀐 생활습관에는 관성이 생긴다. 즐겨 먹지 않던 채소에서 몰랐던 단맛이 느껴지고, 매일 하는 운동에서 묘한 중독성이 생긴다. 어릴 때부터 지구력이 좋았던 덕분에, 한번 붙잡은 습관은 큰 노력 없이도 이어갈 수 있어 다행이다.

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통과 두려움은 서서히 흐릿해지고, 관성도 힘을 잃어 간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유지해 오던 것들에 의식적인 노력을 더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 암환자가 지켜야 할 생활습관 대부분은 일상의 편안한 유혹들을 거슬러야 지킬 수 있는 것들이다. 1년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는 큰 노력 없이도 괜찮다. 관성도 힘이 빠지지 않는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

운동: 규칙적인 운동은 유지하기 어렵다. 컨디션이 나쁘거나 일이 바빠서 하루이틀 빠지기 시작하면 다시 잡기가 쉽지 않다. 나는 정 안 되는 날에는 헬스장에 가서 샤워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나간다.

음식: 가려야 할 것들이 많다. 상황에 따라 먹으면 안 되는 음식만 앞에 놓이는 경우도 있다. 건강식을 기본으로 하되, 어쩔 수 없는 자리에서는 유연하게 먹으려 노력한다. 단, 술은 절대 노노!

스트레스: 회사를 다니면서 관리하기가 제일 쉽지 않다. 사람에게 치이고 일에 치이다 보면 화가 치밀기도 하고 승부욕도 생긴다. 딱히 잘 관리할 방법이 없다.

다짐: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고, 후회없이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현재를 즐기며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생각만큼 쉽지 않다. 아직 더 많은 깨달음과 해탈이 필요한 것일까?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알게 되었는데, 몸으로 행동하는 것은 잘하고 있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쉽게 통제되지 않았구나..


이 글을 쓰는 건 1년의 소회를 정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다짐을 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삶을 대하는 자세는 여전히 단단하게 붙잡고 있지만, 사람인지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과정에서 늘 담대하지는 못하다. 때로는 시야가 좁아져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도 하고, 욕심 가득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잘려진 마지막 항암 자국 발톱처럼, 어리석음과 욕심도 함께 잘려 나갔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