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스 갬빗>이 밀레니얼에게 사랑받은 세가지 이유

기존 성공 신화 이야기 문법을 비틀다

by 킥업 이남석

<퀸스 갬빗>은 기존 성공 신화 문법을 비틀거나 삭제했다. 그래서 단기간 폭발적으로 밀레니얼의 사랑을 받았다. 성공 이유를 찬찬히 살펴 보자.


첫째, 멘토가 없다.

다른 영화의 성장 스토리를 떠올려 보시라. 과거의 영화를 보면, 주인공 옆에는 항상 멘토가 있었다.

<굿 윌 헌팅>의 수학, 법학, 역사학을 거느리는 천재 윌에게는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심리학 박사가 있었다. 또한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에게는 그의 스승인 요다가 있다. <헝거 게임> 시리즈의 여전사 캣니스에게도 헝거게임 우승자인 헤이 미치가 있었다.

그런데 <퀸스 갬빗>의 주인공, 베스 하먼에게는 멘토가 없다. 그녀의 옆에는 상처를 위로해 줄 로빈도, 가르침을 내려줄 요다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해줄 헤이미치도 없었다.

베스 하먼이 체스를 접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청소부는 멘토일까? 아니다. 작중에서 베스 하먼은 누군가를 스승으로서 모시고자 하는 존경심을 갖기 보다는, 이기고 싶은 경쟁심을 품었다. 베스 하먼은 청소부 이후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다양한 사람들과 경쟁했다. 그리고 그녀는 승리신화를 쭉쭉 써내려갔다.

베스 하먼에게는 숨은 멘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어떻게든 이기려는 승부욕. 그녀는 체스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체스를 이기고 나면 자신이 왜 이겼는지 복기하고, 특정 상황에 다른 수를 어떻게 둘 수 있었는지를 분석하였다. 심지어는 침대에 누워서 천장에 보이는 체스판과 씨름했다. 자신의 엄마가 티비쇼를 보며 깔깔 웃을 때도, 텔레비전 앞에 앉아 같이 보기는 커녕 체스판과 체스 관련 서적을 들여다본 게 바로 베스 하먼이었다.

자, 한 번 상상해 보라.

만약 <굿 윌 헌팅>에서 로빈이 없었다면, <스타워즈>에서 요다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헝거게임>에서 헤이미치가 존재 조차 하지도 않았다면 어땠을까? 분명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가 허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퀸스 갬빗>은 다르다. 멘토 따위는 필요 없다고 외친다. 나에게는 내가 있으니까. 1960년대보다 2020년대의 밀레니얼에게 더 어울리는 태도가 아닌가. 이것이 <퀸스 겜빗>이 일명 me generation이라고 불리는 밀레니얼에게 사랑받은 첫 번째 이유다.


둘째, 악역이 없다.

베스 하먼은 시합에서 계속 이기며 순위가 올라가다 보니 보르고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이후 그와 시합을 하고 나중에 러시아에서 최종 시합을 할 때까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를 악역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대로 이기기 위한 전략을 쓰며 체스를 뒀을 뿐이니까.

다른 악역 후보자인 베스 하먼의 양아버지는 그녀를 돌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비중은 굉장히 적어 그를 스토리 중심을 놓고 주인공과 대적하는 악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악역이 없는 것은 제작진의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악역이 없으니 오로지 주인공인 베스 하먼의 말, 행동, 변화에만 더 집중할 수 있다. 맞다. 집중해서 보면 진정한 악역을 발견할 수도 있다. 바로 베스 하먼 자신.


베스는 늘 게임에서 이기고 싶어서 안달이다. 지는 것이 싫고 두렵기도 해서 철저하게 준비하지만 막상 최종 도전 직전 즉 한 단계 도약이 약속된 성장과 성공의 문턱에서 술을 마셔 집중하지 못하는 것도 베스 하먼이었다. 고아원을 벗어나 이제는 억지로 주는 사람도 없으며,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향정신성 약물을 입에 털어 넣는 것도 자기 자신이었다. 확고하게 체스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하면서도 갈팡질팡한다. 천재여서? 아니다. 그 이유는 아이유의 노래 가사 <스물셋>에 나온다.

난, 그래 확실히 지금이 좋아요
아냐, 아냐 사실은 때려 치고 싶어요
아 알겠어요 난 사랑이 하고 싶어
아니 돈이나 많이 벌래
맞혀봐
어느 쪽이게?

베스 하먼은 이상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평범한 청춘이었다.

우리도 그렇다. 쉼없이 이상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한다. 퇴사하고 시골로 들어가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이 된 듯한 일상을 살아가고 싶으면서도 도시에서 커리어의 정점도 찍어 인터뷰나 강연을 해보고 싶고, 인정받는 일잘러가 되고 싶다가도 구석에서 몸을 사리며 가급적 적게 일하고 덜 신경쓰면서도 월급도둑질은 확실히 해내고 싶어하기도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직장인이라면 베스 하먼의 반복되는 일탈과 열정적인 도전이 낯설지 않다. 우리도 베스 하먼과 다를 바 없다. 하루하루 자기 자신과 싸워나가고 있지 않은가.

<퀸스 갬빗>은 멘토뿐만 아니라 악역까지 없앰으로써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세상과 대적하며 성장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현실을 더 많이 드러냈다. 그 현실, 그런 주인공에 밀레니얼이 더 많이 공감할 수밖에.


셋째, 성공보다는 성장에 더 집중했다.

베스는 어릴 때부터 각종 대회를 휩쓸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날에는, 또 이기려고 긴장을 바짝하며 에너지를 소모하거나, 술과 약 등으로 일탈하기 일쑤였다. 체스에서 지는 날에는 더욱 상태는 심각해진다. 패배에 대해서 매우 좌절하며 곧바로 깊은 불행에 빠져버린다.

순위가 올라가 여러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인정 받아도 술과 약에 손대며 곤두박질치는 모습이 마지막화를 제외한 모든 편에 등장한다.

과연 <퀸스 갬빗>을 단순히 천재 소녀의 승승장구 성공기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성공기인 동시에, 방황하는 실패기이기도 하다.이는 괴테의 저서 <빌헬름 마에스터의 수업시대>와 유사한 이야기 구조이다. 빌헬름이 마에스터의 수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언뜻 보면 성공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양한 방법으로 실패하는 모습이 드러나도록 배치한 것처럼 말이다. 총 7편의 드라마중 7편 초반부까지 베스 하먼은 성공이나 성장을 이룬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괴테의 작품에서 나오는 구절처럼 그저 "안으로 밖으로 상처를 입고 있었다"는 말이 딱 맞았다.

아니, 어쩌면 <퀸스 갬빗>에서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승리와 패배에 연연하던 베스 하먼은, 작품의 마지막화에서는 더이상 성공과 실패를 논하지 않았다. 그 이상의 것인, ‘자신’을 이야기했다.


러시아(구 소련)에서 개최한 시합에 가서 베스 하먼은 상대를 더 이상 패배를 두려워하거나, 실패를 걱정하지 않았다. 긴장하거나 자책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자만하거나 타인을 깔보지도 않았다. 약에 의지하지 않고도 체스판을 천정에 올려, 상대의 수를 미리 계산하고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수를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베스 하먼에게 패배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니었다.

각국의 챔피언들은 베스 하먼에게 패배하였다. 일부 챔피언은 분해서 자리에서 그대로 일어났다. 예전에 베스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최고 수준의 챔피언은 패배에 좌절하지 않고, 승자에 대한 예우를 건넸다. 왜냐하면 성장한 사람이었으니까. 베스 하먼 역시도 패자에게 예우를 표했다. 이 경기로 인해서 한 발 성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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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베스 하먼은 경쟁자와의 시합이 유예되었어도 호텔방에 들어와 차분히 내일을 준비할 정도로 성숙했다. 설령 내일 자신이 패배하여도, 충분히 멋진 경기를 했다며 패자인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는 수준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때, <퀸스 갬빗>의 악역인 ‘자신을 망치는 자신’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회를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길. 국무성 직원의 일정 설명도 건성으로 듣던 베스는 혼자 차에서 내린다. 처음에는 목적지가 없는 것처럼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곧 거리에서 여러 노인들이 앉아 체스를 두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서 체스 선수인 자신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지만, 사인을 해주거나 사진을 찍어주지 않았다. 한 노인이 체스 한 판 두겠냐고 제안하니, 체스판 앞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체스 한 판을 두기 시작했다.

노인과 체스판을 앞에 둔 베스의 조용한 미소는, 자신의 마음에게 집중하며 행복을 찾게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이기고 싶은 욕심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며 생긴 방황이 끝남과 동시에, <퀸스 갬빗>은 막을 내린다.

이 장면에서 베스 하먼은 원작 소설의 에필로그에 인용된 예이츠의 시 <소금쟁이(long-legged fly)>의 나오는 구절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Like a long-legged fly upon the stream
Her mind moves upon silence.
(물 위의 소금쟁이처럼
그녀의 마음은 조용히 움직인다)

<퀸스 갬빗>은 드라마틱한 성공을 보여주면서 시청자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멘토도 악역도 없이, 오롯이 주인공의 이야기를 펼치는 데에 집중하며 me generation 시청자들의 감정이입을 도와주었다.

<퀸스 갬빗>은 우리에게 교훈을 남겨주지만, 꼰대질은 하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화에 고아원 시절 친구 졸린이 불쑥 등장해 툭 대사를 던진 것처럼, 밀레니얼에게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야기를 건네주는 듯하다.

"난 널 이해해. 너는 나야. 힘들 때 누군가 나에게 그래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도 이번 도전의 성패와 상관없이 일단 네가 행복하게 돕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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