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봐야 하는 영화가 있고
아파서 봐야 하는 영화가 있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어느 쪽일까?
심리학자들은 사소한 것까지도 가설을 만들고 실험으로 검증하려고 한다.
실제로 연인과 이별한 다음에 슬픈 음악을 듣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까,
즐거운 음악을 듣는 것이 좋을까 하는 문제도 연구했다.
결과는?
슬픈 음악을 듣는 게 정신건강에 더 좋다.
왜?
자신의 슬픈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공감의 힘 때문에.
슬플 때 즐거운 음악은 귀 너머에 있는 마음까지 잘 도달하지 못한다.
<내가 죽던 날>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심리학자가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 영화를 보여준다면
어떤 영화가 좋을까 궁금할 때 실험에 쓰기 딱 좋은 영화'라고.
굳이 불교 설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세상에 마음이 아프지 않고 슬픈 일 겪지 않은 집,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믿었던 사람이 떠나고, 믿지 않았던 놈이 다가와 상처주고, 믿기 싫은 일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니.
그런 현실에 상처받은 사람에게 <내가 죽던 날>은 계속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영화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혼 위기의 형사, 아빠의 잘못으로 곤경에 처한 고등학생,
조카를 키우는 섬마을 주민의 공통 분모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상처"이다.
모두 다 삶의 벼랑에 설 정도의 상처.
세 명의 상처는 참으로 깊다. 그리고 참 일어나기 쉽지 않은 일로 만들어진 상처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세 명의 상처에 공감이 간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정도의 공감이 아니다.
정말 노답인 상황에 내던져져 고립된 상태에 대한 공감이다.
어쩌면 나 역시 잘 몰랐지만 주인공들처럼 아팠나 보다.
<내가 죽던 날>은
아파서 억지로라도 더 나아지자고 보게 되는 코미디, 아파서 공감용으로 보는 비극,
아파도 현실 인식을 위해 보게 되는 고발 다큐 같은 영화와도 다르다.
함께 아파하게 된다.
김혜수가 영화 인터뷰에서 현장에서 다른 배우를 안고 그냥 계속 울게 되었다고 하는 말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삶을 떠올리는 형사(김혜수)처럼 관객은 세 주인공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충분히 공감하게 되었을 때 대안도 만들어졌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식의 공감으로는 값 싼 연민이나 곡 소리 공명하는 공멸의 고통 배틀이 만들어지기 쉽다.
그러나 <내가 죽던 날>은 주인공들이 마치 상대가 자신인 것처럼 공감을 한 다음 그 사람이 자기도 하지 못하는 경지에 올라서 잘 살아주기를 응원한다. 누군가 자기에게 그렇게 응원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방향을 바꿔 남을 도와준다.
영화 속 한 여자가 말했다.
"나에게는 다 떠나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
다른 여자가 말했다.
"아냐, 그래도 너는 있잖아."
자기 자신에게 해줬어야 하는 말들이 이어진다.
"누군가 이 힘든 상황에서 자신을 구조해주기를 바라지만, 자신을 구조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이 말을 전하면서도 그 사람은 상대를 구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게 진정한 공감의 힘이다.
영화 <미나리>에서 주인공 젊은 부부가 아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복도에서 기다리며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 받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한국에 있을 때 서로를 구원해주자고 결혼했잖아."
상대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그리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누군가 구원해주기를 바란 마음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미나리>는 상처를 더 키우는 장면을 많이 보여준다.
우리는 누군가 힘들 때 그 자신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게 도울 수만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우리는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힘들수록 우리 자신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게 힘을 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 과거의 우리는 죽고, 새로운 우리의 삶이 펼쳐질 수 있음을 <내가 죽던 날>은 잘 보여준다.
자기소개서에 자연스럽게 쓰게 되는 것처럼
과거의 나, 현재의 나만 내가 아니라 미래의 나도 나다.
뭔가를 확실히 살려야 한다면
아니 그러기 전에 뭔가 죽여야 한다면 선택해야 할 나는 명확하다.
구원의 리셋 버튼은 우리에게 있다.
<내가 죽던 날>은 자기가 아픈 줄 모르다가 훅 들어오는 장면들에 아파도 아파니까 그렇게 아파서 봐야 하는 영화다. 주인공에게 공감하면서 주인공처럼 용기내고 주인공처럼 힘을 얻고 과거의 나를 죽이고 힘을 나눠주는 길이 보이니까.
p.s.
공감이 나쁜 건 아니다. 고통의 공감만 나누며 마치 공멸이라도 감내해야 나 자신과 상대를 존중하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가 나쁘다. 고통에 대한 존중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존중도 중요하다. 고통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그 고통도 살아보려는 마음, 살아 있음에서 나온 것이니.
주인공이 고통 속에서 어떻게 죽게 되었을까를 추적하다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볼려고 발버둥친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자신에게 있는 힘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를 <내가 죽던 날>에서 발견하기를 추천한다.
(제작진은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주인공들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관객은 사전부검이라는 기법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영화를 다 본 다음에 "사전부검(premortem)"을 검색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