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ang Li 스튜디오에서의 근무는 쉽지 않았다. 영어가 서툰 나는 혹시 못 알아들을 까바 일하는 동안 계속해서 긴장을 하고 있어야 했다. 나의 주된 업무는 샘플에서 가봉하는 일이었지만 그 외에 스튜디오 안의 필요한 일은 모두 했다. 이 스튜디오의 구성원은 스튜디오 2층의 마케팅 담당직원 남자와 할머니가 있었고, 1층의 어시스턴트 2명 그리고 내가 테스트를 할 때 만났던 샘플실의 독일인과 일본인 패턴사가 있었다.
그리고 인턴으로 일 하고 있던 네덜란드에서 온 Aliza(알리자)와 타이(Taie)가 있었다. 타이(Taie)는 면접당일 길에서 봤던 스타일리시하고 키 큰 남자아이였다. Aliza(알리자)와 타이(Taie)는 둘 다 멋있었다. 그들은 네덜란드 국립학교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있다. 그들은 플레이스먼트(placemant) 학과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6개월간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플레이스먼트(placemant) 과정의 3개월 보다 길었다.
Yang Li(양리) 스튜디오에서 진행 중이던 Aoutom/Winter 파리컬렉션 준비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2016년에는 여성복에 이어 남성복도 론칭하던 중이었다. 스튜디오는 하루하루가 바빴다. 하루종일 가봉과 잡일을 해야 했다. 가능 많은 시간 샘플실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에 패턴사들과 많이 친해졌다. 그중 면접 때부터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Kaede(카이데)라는 일본인 패턴사에게 많이 의지했었다. Kaede(카이데)는 일본에서부터 패턴사로 일했었는데 워킹홀리데이로 영국에 왔다가 마침 Yang Li에서 일하던 일본인 패턴사가 그만두면서 운 좋게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Kaede(카이데)는 패턴과 봉제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쇼 준비가 바빴지만 네덜란드에서 온 친구들과도 짬짬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Aliza(알리자)는 나에게 힙합을 좋아하냐고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한국의 한 래퍼가 네덜란드에서 유명했었다. 나는 힙합에 관심이 없다고 하자 좀 실망한 듯했다. 당시 'Keith Ape'라는 한국의 랩퍼가 유럽에서 인기가 있었다. Aliza(알리자)는 내가 힙합에 관심이 없다고 하자 내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내 나이를 말해줬고, 예상치 못하게 내 나이가 생각보다 엄청 많다는 것을 알고 배가 찢어지도록 웃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의 눈에는 동양인이 실제 나이보다 많이 어려 보인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진짜 유럽인들은 동양인의 나이들 구별 못하는듯했다.
나는 한국에서도 대학을 졸업하고 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유학을 온 친구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스튜디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중 2층의 마케팅 부서의 할머니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았다. 한 번은 Aliza(알리자)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생일에 한인 마트에서 구매한 인스턴트 미역국을 끓여주었는데 엄청 좋아했었다. 나는 미역국(seaweed soup)은 한국에서 여자가 아기를 낳았을 때와 생일 때 먹는다고 설명해 주었다.
쇼피스를 완성시키기 위한 가봉 작업은 끊임이 없었다. 스튜디오에 천장에 닿을 듯한 큰 스티로폼판 3개를 놓고 그곳에 옷의 디테일, 무드, 실루엣 별로 리서치를 붙여 노았다.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옷이 완성되기까지 모두가 총력을 기울였다. 공장에 보낼 스와치 정리, 모델을 들을 불러 핏팅을 봐가며 수정을 계속하며 컬렉션이 완성되어 갔다.
모든 의류의 샘플링과 생산은 아웃소싱으로 진행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급할 때는 패턴사들이 간단한 옷은 만들었다. 컬렉션이 거이 완성되어 갈 때쯤 뉴욕에서 Yang Li(양리)의 친구이자 스타일리스트인 카를로스가 스튜디오에 방문해 모델이 입고 있는 옷의 스타일을 잡아주었고, 인턴들은 정해진 스타일을 쇼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사진을 찍어 남겨 놓았다. 그렇게 컬랙션 준비는 마무리되었다.
파리컬랙션 참가 기간 동안 필요한 사람들은 모두 파리로 이동했다. 인턴들도 함께 가도 좋다고 했지만 비행기 값은 각자가 지불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볼 걸 하는 후회가 든다. 하지만 첫 사회생활로 지쳐있었고, 친구들과 저녁을 먹기 위해 방문한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웨이터가 칼을 내 손등에 떨어 뜨리는 사고로 손을 베였기 때문에 정신력과 체력이 바닥나 있었다. 네덜란드 친구들도 파리컬렉션 기간 동안 본국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였다. 몇십 년 동안 회사를 다니신 아버지가에게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았다.
Kaede(카이데)는 내가 그만두는 날 돈코츠라는 일본 레스토랑에서 다 같이 밥을 먹자고 하였다. 인턴일 뿐인데 그만두는 날 챙겨 주어서 고마웠다. 패턴사와 네널란드에서 온 친구들 그리고 나를 면접 봤던 Katie(케이티)와 함께 마지막 저녁식사를 했다. Yang Li(양리)는 Kaede(카이데)의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거이 끝나가자 정식직원으로 채용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영국회사들은 큰 규모의 회사가 아닌 이상 외국인들을 채용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외국인을 채용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과정과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한다.
이렇게 나의 placemant(플레이스먼트) 과정은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반친구들을 만나니 그동안 일했던 곳을 서로 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인턴을 했던 매장과 비슷한 곳에서 일한 친구도 있고, 아주 유명한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한 친구 등 다양했다. 그 중 여러명이 인턴으로 일했던 한 중국인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인종 차별과 점심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다. 교수님들은 다시는 학생들을 그곳에서 일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했지만, 학생이 직접 일할 곳을 찾아야 하는 placemant(플레이스먼트) 과정 특성상 다음 학년 아이들이 또 일하게 되었고 학교는 다른 대책이 없어 보였다.
이번 학기는 언어도 서툴고 아무 인맥도 없는 불모지에서 오직 도전으로만 이뤄낸 성과 같았다. 첫 사회생활이라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회사에 오래 다니셨던 부모님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두 힘들었었는지 얼굴에는 그동안 한 번도 나지 않았던 여드름이 얼굴에 많이 났다. 다행히 placemant(플레이스먼트) 과정이 끝난 후에 피부는 원상태로 돌아왔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해 보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가 겁도 없이 면접을 보러 다니고 인턴까지 마무리했는지 미스터리다. 그때의 마음 가짐이면 지금도 못할 것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