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혼: 돌아갈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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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떠나는 영혼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아직 떠날 수 없었다. 빛도 공기도 아닌 무언가로 떠돌던 마리아의 의식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채 병원의 침대에 누워 생명을 연장하는 기계에 둘러 쌓인 자신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마리아는 그런 자신의 모습보다 저 멀리서 천천히 안젤로에게 다가오는 J가 더 걱정되었다. 자신은 괜찮다고 한 마디라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안젤로.”
“일단 나가자. 어차피 지금은 가족 외에는 볼 수 없어.”
“가족 외에는…, 볼 수 없구나.”
병원에 있던 다른 가족들은 J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안젤로는 고개 숙인 J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급박함과 차분함이 공존하는 병원의 공기를 벗어나니 여유로운 도시 특유의 분위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병원을 벗어나 안젤로는 J와 잠시 거리를 걸었다.
그들의 곁에 서성거리듯 무언가가 있었지만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여유로운 사람들 사이를 평소처럼 산책하듯 걷던 둘은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마리아가 너희 집에서 지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너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 친손자인 나보다 너를 더 챙기는 것 같다고 엄마가 말할 정도로….”
“… 안젤로.”
“그래도 난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반가웠어. 매일 듣기만 하던 동화 속의 주인공을 보는 기분이었으니까.”
“…….”
“마리아에게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그 집에서 나오라는 이야기를 했어. 일은 그만둬도 되는 나이셨으니까. 그런데 마리아가, 할머니가 싫다고 했어.”
“…….”
“결국 그 집에 혼자 계시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고.”
“…….”
“억지로라도 그만두라고 했어야 했나, 우리가 너무 평소에 소홀히 한건 아닌가…, 혼자 식사하지 마시고 우리 집에 오시라고 할걸 그랬나…. 병원에서 기다리는 동안 모든 가능성을 되짚어 봤어. 나만 그런 건 아닐 거야.”
“…….”
“모두 네 탓이 아닌 건 알아. 하지만 지금은 탓하고 싶은 누군가가 필요할 거야.”
두 사람의 그림자가 만들어진 시간, 그림자 속에 선 마리아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아득해져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J는 울고 있었고, 안젤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그런 J를 천천히 안아주었다. 다정하지만 슬픈 포옹이었다.
“잘 알고 있어. 네 탓이 아니라는 것쯤은.”
“미안해, 미안….”
“미안해하지 마. 그냥…, 그냥 지금은 알고 있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뿐이야.”
다독이는 안젤로는 손길은 슬픔과 안타까움이 묻어났지만, 평소처럼 위로까지 나눠 줄 수는 없었다.
“지금은 나도 너를 보고 있는 게 조금은 힘들어.”
J와 안젤로의 그림자는 천천히 멀어졌다. 그림자 속에 있던 마리아의 영혼은 이윽고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기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위급상황을 알렸지만, 마리아는 육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뭔가가 스치고 지나가듯이 자신의 등 뒤로 사라졌다. 그게 뭐든 지금은 상관없었다.
삶과 죽음은 늘 한 세트와 같은 것이다. 저를 바라보며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은 혼자 걸어가는 저 아이를 쫓아가야 했다.
불안하기만 한 걸음으로 기어이 집에 도착했다. 아직도 범죄 현장을 알리는 폴리스 라인이 있었지만 경찰은 철수를 한 것인지 집의 하나뿐인 주인은 현관문을 열고 평소처럼 귀가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엉망이 된 주방 쪽을 보다가 무슨 생각인지 J는 천천히 걸어갔다. 바닥은 깨진 유리조각과 핏자국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마리아.”
이윽고 냉장고 문을 열고 그대로 굳은 듯 서 있던 J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마리아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냉장고 안에 있던 J를 위한 샐러드는 시들어 있었다. 만들어 두었던 쿠키도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돌아올 사람을 위해, 이제는 하나뿐인 ‘어린 집주인’을 위해 마리아가 남긴 기다림의 모습은 이제 J에게는 죄책감과 슬픔으로 깊게 박혀버렸다.
눈물이 흘러내리듯, 얇은 소녀의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그대로 주저앉은 채 J는, 아니 재희는 한 참을 울었다. 하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소녀의 그림자 속에서 마리아는 닿지 못하는 손으로 그녀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한 참 동안 어둠, 또다시 어둠…. 그 속을 헤매다가 마리아는 어느 시점 후 재희의 그림자 속에 다시 서 있었다.
“뭐라…, 구요?”
“집의 주인은 너니까. 재산상의 피해는 없었고, 네가 고용해서 일하던 사람이 어쩌다가 다친 거니까. 네가 탄원서를 써주면 감형의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그 사람 가족들에게 먼저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 안 통하더구나.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으니 다행이지.”
이번에는 늙은 남자가 와 있었다. 그 옆에는 계속 집안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피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걔도 원래 그럴 생각은 없었데. 네가 그때 돈 자랑만 하지 않았어도 그런 나쁜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야.”
“돈 자랑…, 이요?”
“그래, 네가 그런 큰돈을 그렇게 쉽게 주는 걸 보고 그랬다잖아. 아니, 애초에 주인이 없는 집에 가정부만 있는 것부터가 문제였지. 그건 사고야, 사고. 그러니까….”
시련의 통증이 마리아에게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그림자 속의 재희의 손이 떨렸다.
“당장 나가세요.”
“뭐?”
“당장 나가라고요.”
“설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런 외국인 때문에 네 사촌을 버리겠다는 건 아니지? 네가 그러고도 혼자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떨리던 손은 멈췄다. 차분하다 못해 차가워진 그림자 속의 재희가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도 말했지만, 하나뿐이던 제 법적 가족은 이제 이 세상에 없어요.”
사람들은 때때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려고 말할 때가 있다. 지금 재희는 누군가에게 던지는 말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줄 알면서 한 마디씩 칼날처럼 뱉어냈다.
“그리고…, 당신들은 제게는 뭣도 아니에요. 그저 지금은 제게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을 해친 범죄자의 가족이고, 이제 와서 협박까지 사람들일 뿐이지.”
못마땅한 얼굴로 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지도 않았다. 재희는 그대로 계속 앉아 저물어가는 해와 떠오르는 달빛 사이에 멈춰 있었다.
차라리 울던 때가 나았을지도 모른다. 석상처럼 앉아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있다가 건드리면 깨져버릴 것 같았다.
어둠이 똬리를 틀고 있다가 천천히 기어가는 뱀처럼 번져 재희를 덮쳤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천천히 위험한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들로 향하기 직전에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하지만 재희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협탁을 천천히 뒤져 제인이 예전에 먹던 약들을 찾아냈다. 재희는 계속해서 영혼을 잃은 인형 같은 표정으로 거실과 제인의 침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던 작업실까지 뒤지고 뒤져서 여러 가지 약들을 더 찾아냈다.
거실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여러 가지 약을 올려두고 재희는 한 참을 바라보았다. 그동안에도 끈질기게 휴대전화가 울렸다.
…, 제발…. 받아. J, 그건 옳지 않아. 전화를 받아.
마리아는 달빛으로 그려져 있는 재희의 그림자에 속에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재희의 시선은 계속 수많은 약들 사이를 떠돌았다. 그리고 10번째쯤 울린 휴대전화를 결국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야? 듣고 있어? 재희야, 무슨 일 있어??”
그리웠던 목소리가 재희를 살렸다. 다정한 목소리가 재희를 구했다. 다행이다.
마리아는 그림자 속에서 속삭이던 목소리를 거두고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겼다. 병원의 이름 모를 기계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인가 보다.
돌아가야 한다. 아직은 남편의 곁에 누울 때가 아니다. 쿠키를 혼자 구울 줄 모르는 소녀가 지금 혼자 외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돌아가야 한다. 얼른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삐————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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