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가: 돌이킬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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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언제나’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늘 술에 취하면 폭력을 휘두르고 자신의 팔을 꺾으며 어머니와 동생들을 찾아오라던 아버지가 차사고로 죽었을 때, 그날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고, 그날 자신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지도 않았다. 단지, 그날은 자신이 교회에서 신에게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서 기도한 날이었다.
더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기 힘드니, 제발 이제 아버지를 데려가 달라고. 그렇게 빌었다.
자신이 알기로 신은 언제나 바쁠 테고, 이런 ‘모종의 거래’를 위해서는 어떤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 뭐든 어떤 것이든…, 자신의 것 중 하나를 가져가도 좋다고….
그렇게 아버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막냇동생이 열병을 심하게 앓고는 세상을 떠났다.
대가는 제법 비싼 편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바란다면, 또 그만큼의 죽음이 필요했다. 아니, 사실은 그것 이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덧붙여지는 대출의 이자처럼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는 그때의 기도가, 자신이 바란 ‘모종의 거래’가 떠올랐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대로, 신의 뜻대로 하루하루 계속 진행되는 인생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마리아’인 탓인지 처음 보모로 들어갔던 집에서는 아이들이 자신을 아주 잘 따랐다. 자신도 그 일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몇 년 사이에 모두 비슷하게 생긴 커다란 저택에서 정원의 식물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을 여럿 거치고 거쳐도 도무지 질리지 않았다.
뽀얗고 하얀 아기를 볼 때마다 어릴 때 떠난 동생이 계속 떠오르는 것은 자신이 무리하게 요구한 일의 대가에 대한 이자라고 느꼈다.
삶은 늘 녹록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늘 비바람만 부는 찬 계절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차가운 계절이 지나면 봄이 오듯 언제나, 불행과 행복은 혼재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행복을 더 많이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전혀 다른 남편을 교회에서 만난 것은 행복한 일이었지만, 남편이 직장을 잡고 안정적인 일을 시작하자마자 첫째 아이가 유산된 것은 불행한 대가였다.
그래도 여러 명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의 바른 성장을 살펴보고 모두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축복’,
그 단어를 생각했던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남편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었을 때. 다시 한번 신이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여러 집을 전전하며 해오던 일이 힘들어질 때쯤이었고, 불행과 행복을 오가는 시간 속에서 어릴 때 가졌던 간절함은 사라져 버렸다고 여겼다.
자신은 대가로 지불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더는 바라는 것도 없었다. 의뢰가 없으니 대가도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편의 장례식이 끝나고 자식들을 두고 정처 없이 걷다가 벤치에 앉아 누군가 두고 간 신문을 시선을 던졌다. 예전에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많이 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땅에 묻혀있는 남편의 옆에 잠을 자듯이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맑은 하늘 아래 불행을 닮은 우울함이 자신을 덮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쉬고 싶었다. 마음을 눕히고 싶었다. 더는 불행과 행복 사이에서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며, 그에 대한 이자를 지급할 자신이 없었다.
‘입주 보모 구함.’
마음은 분명 그러했는데, 신문에 적힌 그 글자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은 채 연락처만 있는 그 구인광고를 보다가 홀린 듯 전화를 했다.
신은 정말이지 이상한 방향으로 자신을 이끈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아직 남은 대가의 이자가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다 갚았다고 여기지만 채권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마리아.”
아직 이사한 짐들이 정돈되지 않은 집이었다. 정원의 식물들은 제각각 자라고 있었고, 사람의 손이 한동안 닿지 않았던 건물의 여기저기는 보수 공사 중이었다.
마치 그 집처럼, 모든 것이 새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세련되고 우아함이 깃든 얼굴과 몸짓이었지만 사람의 온기가 없어 보이는 여주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되물었다.
“언제부터 입주가 가능하시죠?”
“다른 건 묻지 않나요?”
작은 의자에 앉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자신을 바라보던 여주인은 그 질문에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이름부터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
“저는 신을 믿지 않지만, 왠지 신의 어머니와 가까운 기분이 들잖아요.”
웃음은 속일 수 없다. 온기가 없는 웃음이었지만, 사람의 진심은 있었다.
명랑하게 웃던 여주인은 저 멀리 뒤편에 서 있던 어린 소녀를 불러 소개해주었다. 반듯하게 자른 머리와 눈동자의 색이 진한 갈색이었다.
이상하게도 자신이 돌보던 뽀얗고 하얀 아기들보다 훨씬 큰 소녀였지만, 마리아는 한눈에 알아봤다.
이 소녀에게는, 아니 이 모녀에게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신은 또다시 자신이 필요한 곳에 당도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오늘부터 입주하겠습니다. 당장 도와드려야 할 것도 제법 많은 것 같으니까.”
두 손을 모아 ‘짝’ 소리 나게 박수를 치던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그제야 밝혔다.
“제인이에요. 이쪽은 J라고 부르세요.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아직도 제인의 곁에 서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선 소녀에게 처음으로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리고 아직도 경계심이 보이는 그 갈색 눈동자를 보자 결심했다.
“안녕. 앞으로 나를 부를 때는 ‘마리아’라고 부르면 된단다.”
소녀의 성장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지켜보겠다는 다짐. 무덤 속 남편의 곁에 눕는 것은 조금 더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신이 제시한 이 거래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제법 오래된 장기 이자 지급이라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마리아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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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은 늘 파티와 갤러리 행사, 그리고 출장으로 바빴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늘 있는 외박에 정원을 밝히는 불을 켜 두는 것이 나름의 의식이 되었다.
“제인은 오늘 늦는다는구나.”
“알아요. 마리아, 쿠키 만들 줄 알아요?”
“당연하지. 만들어줄까?”
“…, 아니요. 괜찮아요.”
당연하지 않은 일은 당연한 것으로, 당연해야 할 일은 당연하지 않은 일로 소녀는 배웠던 모양이다.
십 대에 들어선 소녀는 엄마를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기다리지 않는 척했다. 두 모녀의 가장 사랑스러운 시간은 잘 정돈된 정원 바라보며 제인이 J의 머리를 빗어주는 시간이었다.
제인이 없을 때는 자신이 해주었지만, J는 ‘고마워요.’라는 말 외에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온기가 없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모녀 사이가 되었으니, 둘의 시간은 따뜻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두 사람이 누구보다 서로를 아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을 그리는 제인을 바라보고 있는 J의 시선이나, 늦은 밤에 귀가해도 J의 방에 들려 잠든 소녀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제인의 시선은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감정이 있었다.
학교와 갤러리, 그리고 초대받은 파티와 주최한 파티, 또…, 병원.
마리아는 자신은 잘 모르는 다채로운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두 사람이 아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에 대한 불안정한 믿음도, 서로에 대한 죄책감 같은 사랑까지도….
다시 몇 년 후, 제법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자식들은 이제 그만 힘든 일을 그만두고 쉬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마리는 아직도 자신이 할 일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아직 자신에게 맡길 일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좀 오래 집을 비워야 할 것 같아요.”
어느 날, 제인이 새벽녘 짐가방을 싸 집을 나설 때 자신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마리아는 제인을 다정하게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머뭇거리던 마리아를 향해 먼저 손 내밀어 안아준 것은 제인이었다.
“제가 없는 동안 J를 잘 부탁해요. 너무 많이 미안하다고…. 아니, 아니에요. 그냥 여행 다녀온다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제인이 떠나고 J는 불안정한 삶의 파도에 떠밀려 한참을 허우적거리다가 한국으로 떠났다. 얼마 후 다시 제인과 함께 돌아왔지만, 제인은 많이 아팠고 J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사실은 달라져야만 했다. 마리아가 보기에는 어린 J가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일들이 도미노처럼 계속되었고, 온갖 루머들은 쏟아지는 비처럼 두 사람을 괴롭혔다.
마리아는 J에게 자신의 막내 손자 안젤로를 소개해주었다. 다행히도 자신의 남편을 닮았던 다정한 안젤로는 J의 소중한 친구 또는 형제 같은 사이가 되어주었다.
집에 돌아오면 늘 그 자리에 있는, 그런 안전한 버팀목까지는 아니더라도 손을 짚어 잠시라도 쉴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신의 계획은 얼마나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앞에 들어선 슬픔 끝에 안정과 행복이 있기는 한 걸까.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찾을 때까지 그녀는 견딜 수 있을까.
“마리아, 내가 없어도 계속…, J에게 쿠키를 구워줄 수 있나요? “
“당연하죠.”
“고마워요. 역시…, 전 쿠키에는 소질이 없나 봐요.”
시간이 흐르고 주변 정리가 끝났다 생각되던 날, 제인은 그런 말을 했다. 그리고 비가 내리던 날에 신의 곁으로 가버렸다
제인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홀로 남은 J가 아직은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숨 쉴 수 있는 것은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어느 날 찾아온 ‘불청객’은 혹독한 신의 계획이 남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맞닥뜨릴 수 없는 불행도 때로는 있는 법이니, J가 갑작스럽게 다시 한국으로 떠난 어느 날도 마리아는 그녀가 그 불행을 무사히 피하고 행복하기만을 빌었다.
행복. 그래…, 행복 말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큼 이미 충분한 불행을 안겨주지 않았던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인가.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 해도 이제 J에게 남은 것이 없지 않은가. 소중한 것들은 전부 빼앗아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여전히 모든 일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금고, 어디 있어!? 말해!”
지금 자신의 앞에 선 스키 마스트를 한 남자의 목에 눈에 익은 타투가 있는 것을 본 순간, 마리아는 깨달았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예전에도 그랬듯이…. 하지만 이건 분명히 자신이 먼저 제시한 거래가 아니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꺾였던 어깨가 다시 뒤로 꺾이고 총소리와 함께 붉은 피로 물들고, 자신의 머리가 바닥에 닫기 직전에 깨달은 사실은.
“오, 신이시여…, 제발, 그녀를 그만…….”
자신이 치르고 있는 이 모든 불행이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것….
그동안 마리아는 운명 혹은 신이 만든 계획, 그리고 주인을 알 수 없는 거래까지 무엇이 목적인지 알 수 없지만 그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믿었다.
많은 불행 속에서도 단 하나의 행복을 찾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 순간 처음으로 그 뜻이 올바르지 않다고 느꼈다.
지금 상황의 결말에 대해 그녀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분명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옳지 않다. 많은 것을 준 것도 아니면서, 오해와 불행으로 버무려진 삶 속에서 간혹 어쩌다 발견하는 작은 행복 조각 따위를 주었으면서….
대체 왜…, 왜….
의식을 잃기 전, 마리아는 신의 교활한 웃음소리를 들은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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