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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Jan 11. 2022

침묵의 상상

| 반짝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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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니다. 숨을 죽인다는 말은 관용적인 표현일 뿐, 사실은 숨을 쉴 수 없었다.

검은색 티셔츠를 반쯤 입다가 그대로 뒤를 돌아보던 너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하긴, 그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으니까.


하얗다 못해 질린 것 같은 얼굴색도 살짝 졸린듯한 그 눈매와 긴 속눈썹도.

나를 보고는 얕게 한숨을 내쉬는 얇은 입술도.

야, 넌 매너가 없어, 매너가.

라며 작게 툴툴거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도.


무엇도 변한 건 없는데, 난 도대체 왜.

그 장면이 계속 꿈에 나타나는 건가….


영화 속 슬로모션처럼 느릿느릿,

얇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 검은색 티셔츠를 따라서 나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그 꿈.

완벽하게 너의 등이 가려지는 그 마지막 장면까지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그렇게 너를 보고만 있다.


고작 몇 초? 정도였을 뿐이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서너 번 정도는 있었던 일이었는데.


대체 나와 너 사이에 뭐가 변한 걸까.


매일 보던 친구가 다르게 보일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가정은 어디까지나 ‘이성친구’ 일뿐이었다.




“뭔데. 너 오늘 왜 이렇게 신경 쓰이게 굴어.”




지금 내 앞에서 이런 말을 쫑알거리며 염색한 금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네가 아니었다.


색은 마음에 드는데 너무 많이 상했어,라고 쫑알거리며 뚱한 표정으로 나랑 시선을 마주하다가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니 다시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린다.


문득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가 너와 너무 잘 어울려서 그런 것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날씨 좋다.”

“…….”

“…….”

“…….”




아마도 날씨 이야기까지가 한계였던 모양이다.


넌 네 앞에 커피 잔을 들어 호로록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다.




“진짜 신경 쓰이게 하네. 일어나, 너 좋아하는 산책이라도 하자.””

“신경 쓰지 마.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뭐? 뭐라고 했어?”

“알았어. 일어날….”

“방금 뭐라고 했냐고.”




거실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올려다본 너의 금빛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는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이 금빛 머리카락을 더 반짝반짝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긋나긋하게 되묻는 목소리는 내 발목을 붙잡아 결국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귀는 것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말라고. 친구끼리 무슨….”

“사귀면?”

“뭐?”




허리를 숙인 너의 졸린듯한 눈매가 천천히 가까워진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 얼굴에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 앉으니 얇은 입매가 웃는다.




“겁나 신경 쓰여서 사귀어 줘야겠네.”

“…….”

“근데 사귀면 뭐가 다른가?”




장난스러운 말투, 다시 허리를 쭉 펴고 너는 밖을 보며 그런다.


반짝이는 너의 시간과 나긋한 너의 말들이 스치듯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마법처럼 내 입술이 움직여 어려웠던 무언가를 꺼냈다.




“같지만 다르겠지.”




내가 네 옆에 있는 건 변함없겠지만 오해 때문에 개싸움 하는 날이 더 많아질 거고, 예전처럼 화해하는 것도 같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할 수도 있겠지.


네가 멋있거나 예쁜 날에는 기분이 좋다가 또 나빠질 것 같기도 하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랑하겠지만 또 어떤 날에는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귀찮아서 잠수도 탔다가 다시 너한테 싹싹 빌면서 무릎 꿇을지도 몰라.


운동하는 거 좋아하는 나한테 네가 맞춰서 같이 해주는 날도 많겠지만, 막상 시작하면 네가 나보다 더 잘하니까. 난 또 그게 분해서 성질부리고 그러다가 또 감정 상하고 싸우고 그거 또 받아주고.


주변 애들은 우리 때문에 더 피곤해지는 뭐…, 그런 날들이….


같지만 분명히 다르겠지.


그런데 그런 날이 우리한테…, 있을까.


막을 수 없는 말들이 취중이 아닌데도 흘러나와서 반짝이는 시간 속의 어느 오후에 향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은 너에게 갔고,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 모든 것들이 내 꿈이라면 좋으련만, 꿈은 아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끝을 꽂은 채, 계속 밖을 바라보던 너는 한참 만에 드디어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마…, 넌 나한테 입 맞추고 싶은 날에 술기운을 빌려야 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가 너보다 술은 더 잘 마시니까 난 또 그거 가지고 한참 놀려먹을 수 있을 것 같고.”

“…….”

“손해 볼 것 같지는 않네. 재미있겠다.”




내 앞으로 내미는 너의 손을 보며 악마와의 거래 제안이라도 받은 것 마냥 흠칫 놀라자, 작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번진다.




“일단은, 난 지금 네가 신경 쓰여 죽을 것 같으니까.”




내가 너의 손을 잡으며 당긴 것인지, 아니면 네가 나에게 안긴 것인지. 그도 아니면 우리 둘 모두가 처음부터 바란 것인지…….




“역시 내가 더 아깝기는 해. 그건 너도 인정하지?”




키득거리는 작은 웃음소리와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가깝게 들렸다. 꿈속에서 여러 번 보았던 그 얇은 허리와 너의 마른 등이 모두 내 손안에 들어왔다.  


너와 나, 앞으로의 날들이 모두 같지만 다르기를.

한편으로는 분명히 다른 그 모든 것들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같기를.


아니, 아니다.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이 부디 꿈만은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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