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행: 늦지 않게,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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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나무는 정원을 지키듯 푸르르고 굳건하게 서 있었다.
재희는 아침 일찍부터 정원을 손질하러 온 업체의 직원들을 위해 대문을 모두 열었다. 각종 기계와 낯선 도구들이 정원의 한편을 차지하고 각자의 역할에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어제 미리 따 놓은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내주었다.
“마리아의 레시피대로 만들었는데, 괜찮나요?”
“늘 마시던 그 맛입니다. 마리아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 네.”
“유감입니다.”
몇 년째 꾸준하게 정원을 관리해주던 업체의 책임자는 마리아와 연배가 비슷한 라틴계였고, 꾸준한 계약으로 신뢰가 많이 쌓인 관계였다.
“정원 관리에 유난히 까다로운 분이었지만, 전 그게 오히려 좋았지요. 특히 저 레몬 나무에 공을 많이 들이더군요.”
“그랬어요. 맞아요.”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저한테 저 나무를 심어 달라고 했어요.”
제인이 처음 이 집을 구매했을 때, 넓고 화려하기만 했던 집을 수리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게 꾸몄다. 그리고 그때 마리아도 함께 이 집에 들어왔다. 어린 자신을 위해 무릎을 낮춰 인사를 건네던 따뜻했던 사람.
정원은 관리 안 한 티가 많이 났었고, 수풀이 우거진 정돈 안 되는 마당은 결국 전문 업체를 부르도록 만들었다. 제인은 마리아에게 정원 관리를 모두 일임했다. 사실 일이 바빠지고 가사와 주택관리 등 세부적인 것은 모두 마리아가 해 주었다.
지금은 모두 이 큰 저택에 홀로 남은 어린 주인이 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자라는 만큼 나무도 함께 자랐군요. 저렇게 큰 나무가 아니었는데.”
밀림 같아 보이던 수풀이 사라지고 마당의 잔디가 일정하게 자라 있고, 적당한 꽃과 나무, 무엇보다 탐스러운 레몬이 열리는 나무가 있는 정원.
적지 않은 시간을 공들여 가꾼 느낌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햇살이 따뜻할 때도, 아주 가끔 비가 올 때도, 그리고 정말 드물게 날이 흐릴 때도. 마리아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오롯이 자리 잡고 서 있었다.
늘 정원의 레몬 나무가 잘 보이는 자리에 서서 제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거나, 재희가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뒷모습을 보던 사람이 마리아였다.
늘 돌아보면 제 자리에 있는 가구처럼, 기댈 수 있는 의자처럼, 손 내밀면 자신을 위해 쿠키를 구워주고 차를 내어주고, 아주 가끔은 제인을 대신해 재희의 머리를 빗어주기도 했다.
“그러게요. 나무를 가꾸듯이 마리아는 저를 가꿨으니까요.”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다.
재희는 그날, 저물어 버린 검은 그림자 안에서 혜숙과 통화한 후 울지 않았다. 매일 마리아를 생각해도 즐거웠던 기억이 더 많아서, 행복했던 순간만 있어서 울 수 없었다. 자신이 울어버리면, 마리아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마저도 영영 기억할 수 없는 슬픔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초록잎 사이로 예쁜 노란색이 화사하게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밝게 살라고, 행복해지라고. 누군가가 계속 말을 걸고 있는 듯했다.
“거의 다 끝났네요. 다음 일정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비를 정돈하는 업체 직원들이 거의 다 나갈 때쯤, 대문 너머로 두 손 가득하게 무언가를 들고 걸어오는 안젤로가 보였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오늘 정원 관리하는 날이라고 하길래. 혼자서 또 어쩌나 싶어서 와 봤지.”
“아무것도 못하는 애 취급이야?”
“아무것도 못하는 건 맞지. 혼자 밥도 잘 안 먹으니까.”
양손 가득하게 들고 온 것은 재희를 위해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음식이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코를 찡긋하는 안젤로의 잘난 얼굴을 보다가 재희는 웃었다.
“… 고마워.”
거실과 정원 테라스가 연결된 창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주방에서 접시 몇 개를 챙겨 와 거실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날이 너무 좋았고, 음식도 맛있었다.
“상담은 계속 받고 있는 거야?”
“응. 넌 어때?”
“바빠. 공부도 인턴도 쉽지가 않네. 지금도 시간 쪼개서 온 거야.”
“나 보고 싶어서?”
“그것보다 네 방에 그 고급진 AV 시스템이 그립지. 뭐, 그래. 네가 보고 싶었던 것도 있고.”
웃으며 말했지만 안젤로가 마리아가 있었을 때 만큼 자주 오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뿐일까. 잠깐 생각했지만 재희는 내색하지 않았다. 안젤로 외에 마리아의 다른 가족들은 아직도 재희를 원망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원망마저 그만두라고 할 수 없으니까.
그냥 이렇게 가끔 찾아와 일상을 묻고, 전화를 해주고, 자신의 일상을 알려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건 두고 먹어. 일부러 많이 사 왔으니까, 상하게 두지 말고. 꼭 챙겨 먹어.”
“너 지금 마리아 같아.”
“밥을 안 먹다니. 베이비, 할머니 속상하게 정말 이럴래?”
마리아가 평소 하던 말투를 흉내 내면서 안젤로가 냉장고를 정리했다. 만들어둔 레모네이드를 나눠 마시고, 안젤로는 바쁘게 작별을 고했다.
침묵이 가라앉은 정원, 새소리가 가끔 나는 그 풍경 속에 레몬 나무와 더 멀리까지 쭉 시원하게 뻗은 푸르른 색감과 이웃한 각가지 색의 지붕, 그 보다 작게 보이는 건물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사실 거의 매일이 혼자다.
어떤 날은 정원을 바라보며 하루 종일 테라스에 앉아만 있기도 했었다.
지독한 외로움이라고 하기에는 이제 너무 익숙함이 되어버린 그 시간마저 재희는 그냥 자신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까지나 혼자…….
원우는 가끔 연락을 했지만, 시호가 다녀가고 난 후에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기대 아닌 기대를 하게 될까 봐. 어쩌면 ‘내가 곧 갈게.’라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
자신이 일본에서 급하게 떠난 후 원우가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사실도 얼마 전 혜숙에게 들었다. ‘네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일부러 말 안 했어. 원우도 이제 퇴원했고, 지금은 정말 괜찮아.’ 한 마디씩 들을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지금 시간과 상관없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감출 수 없어서, 제가 느끼는 슬픔과 관계없이 떠오르는 원우에 대한 걱정들을 미룰 수 없을 것 같아서.
마치 자신이 둘이 된 기분이었다. 슬픔을 느끼는 것이 마땅한 ‘J’와 그가 없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재희’.
둘이 된 자신은 도대체 어디서 다시 만나 하나가 되어야 할까.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건조하고 따뜻한…, 바람.
“대문이 열려 있네.”
아주 아주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열어둔 어딘가의 문틈 새로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들어온 것처럼. 눈을 뜬 곳에…, 그 사람이 서 있다.
“위험하게 이렇게 열어두면 어떻게 해.”
너무나도 살며시. 그래서 볼을 스치는지도 모를 정도로 가벼워서, 지금 자신이 누구를 향해 뛰는지도 잊었을 정도로.
지난번보다 훨씬 짙어진 머리카락, 조금도 변함없는 미소, 달려오는 자신을 향해 먼저 뻗어오는 그 긴팔과 넓은 어깨. 목을 끌어당겨 안자 자신의 볼에 맞닿는 그의 서늘한 볼마저 변함이 없었다.
“…, 찾았다.”
익숙한 한 마디, 그리웠던 낮은 목소리가 재희의 귓가에서 울렸다.
“너무 늦게 찾아서 미안해….”
저를 꼭 끌어안아준다. 자신의 품 안에 깊고 가득하게 끌어안은 채 그 큰 손으로 예전보다 짧아진 재희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어준다.
꼭 끌어안은 그가 매번 꾸다가 사라지던 꿈은 아닌 것 같아서, 혹시라도 자신이 너무 간절하게 바라던 순간이 환각이 되어 나타난 것은 아닌 것 같아서.
“늦지…, 않았어.”
그제야 재희는 울고 또 웃었다.
둘이 되었던 자신이 다시 만나…, 비로소 하나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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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있는 대문을 넘어 들어서자 넓은 차도와 그 너머로 보이는 더 넓은 정원이 자신이 어디에 왔는지를 알려주었다. 혜숙과 현우가 사는 단정하고 따뜻한 ‘집’의 느낌이 아닌 크기를 한 번에 알 수 없는 ‘저택’, 전혀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서 자신도 모르는 어딘가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테라스와 연결된 정원이 보였고, 눈을 감은 채 앉아있는 재희가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에 실려 온 어떤 무언가가 재희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을 막았다.
자신이 걸어주었던 매듭 모양의 목걸이는 제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모든 것들이 변한 것 같아 보였다. 짧아진 머리카락, 더 얇아진 턱선, 위태롭게 보이는 재희의 어깨가, 무릎에 버려지듯 떨궈둔 얇은 손목까지. 원우는 그 모든 것들을 붙잡아주고 싶었다.
“대문이 열려있네.”
변함없는 것도 있었다. 반짝 뜬 눈으로 자신을 보고 금방 달려오는 그 갈색 머리카락은 변함이 없었다. 언젠가의 소녀처럼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녀를 향해 이번에는 먼저 손을 뻗어 안아주었다. 목덜미에 닿는 하얀 팔과 볼에 닿는 따뜻함까지 모두 그대로다.
다행이다. 우리가 그대로여서….
“…, 찾았다.”
원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다시 천천히 내쉬며 자신의 품 속에 있는 ‘현실의 재희’를 느꼈다. 힘주어 안으면 부서질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수 없었다. 그냥 최선을 다해서 ‘현실의 우리’를 느껴야 했다.
‘현실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마주한 걸까.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에 둘러싸여 있는 ‘나의 지금’과 버려진 것도 아닌데 이 넓은 공간에 홀로 있는 ‘너의 지금’이 ‘현실’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과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을 넘어 마주한 우리는 분명히 함께 있다.
길을 잃어 헤매던 언젠가의 너와 그런 너를 찾아 뛰어가던 어린 나,
예상할 수 없었던 어느 가을날, 번지던 햇살 아래 다시 만난 너와 나,
너를 보내기 싫어 붙잡았던 나, 변해가던 너의 세상을 모르던 나,
달빛 아래 나에게 고백하던 너, 그 고백을 이미 알고 있던 나……,
함께 했던 하늘은 불꽃이 번졌고, 그날 너의 생일에는 하얀 눈이 내렸다.
하늘과 바다를 건너, 가늠할 수 없는 어딘가를 넘어…, 아주 긴 시간을 우린 이어져 있었고,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저 서로를 기다렸다.
이제는 알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그대로인지, 그것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너무 늦게 찾아서 미안해….”
“늦지…, 않았어.”
울먹이는 재희의 목소리에 원우는 한참을 그대로 있어야 했다.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재희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고, 그렇다면 자신이 꼭 이대로 있어줘야 했다.
지금은 무너져도, 추락해도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내가 잡아줄게.
그렇게 꼭 끌어안은 손끝으로, 원우는 재희의 마음에 속삭였다.
빛이 내리고, 바람이 불며, 조용하던 정원에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서로를 붙들고 있던 둘은 겨우 떨어져 그제야 제대로 얼굴을 마주했다.
“아팠다며?”
“너도 아팠잖아.”
“야위었어.”
“너도 마찬가지야.”
“원우야.”
자신의 볼에 닿는 재희의 손길과 함께 불리는 그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원우야….”
다시 동그랗게 말리는 붉은 입술 사이, 흘러나오는 그 이름이 낯설어 원우는 그대로 자신의 입술로 붉은 입술을 막았다.
서로를 끌어안은 둘의 체온만큼 지금의 시간이 조금씩 더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또 한 번, 다행이었다. 우리가 그대로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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