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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Apr 19. 2022

세계와 세계, 그 끝에서 끝까지

| 우리: 새로운 시간으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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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가 변했을 뿐인데도, 적막하기만 했던 공간은 다른 시간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원우는 집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재희의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 들었던 기분을 느꼈다. 들어서자 보이는 깔끔한 응접실과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그리고 옆으로 쭉 뻗은 발코니와 뒷채와 연결된 회랑까지. 모두 투명한 창과 문으로 연결되어 개방감이 끝없이 펼쳐졌다.


4계절이 없는 이 지역만의 특이한 주택 구조인 것 같았고, 원우는 이렇게 끝없이 펼쳐진 넓은 공간을 재희 혼자만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에 작게 한숨이 나와버렸다.




“다행이다. 대접할 음식이 있어서.”

“같이 저녁 먹을 수 있는 거야?”

“응. 점심때 안젤로가 다녀갔거든.”

“안젤로?”

“아, 너한테 말하지 않았나?”

“…, 아니. 알아.”




냉장고 안에서 음식을 꺼내고 부산스럽게 이것저것 접시를 내는 재희의 손길. 원우는 선채 넓은 싱크대 위로 몸을 기대어 오른쪽 손으로 턱을 괴더니 움직이는 재희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한다. 옆에서 그런 시선을 보내는지도 모르다가 문득 눈이 마주친 재희는 일회용기에서 음식을 꺼내 접시 위에 플래이팅을 하던 손을 멈추었다.




“왜?”

“좋아서.”

“어?”

“좋다고, 너.”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깜빡거리는 재희의 짧은 앞머리를 가볍게 정리해주며 가볍게 그리고 결코 가볍지 않은 지금의 마음을 뱉어낸다.




“나만 생각하고 있잖아. 그렇지?”

“무슨 말이야.”

“지금은 나만 생각해 달라는, 그런 말이야. ”

“안젤로는….”





손목을 가볍게 잡혀버린 재희가 말을 멈추는 순간, 원우의 입술이 가볍게 이마 위로 다녀갔다.




“배고프다.”

“알았어. 잠깐만.”

“같이 해.”




플레이팅을 하고 식탁을 함께 세팅하는 동안에도 시선이 마주치면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웃기만 했다.




“먹을 만 해?”

“응. 맛있어.”




달그락거리는 접시 소리와 간간히 밖에서 들리는 이름 모를 새소리가 전부인 공간에서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재희는 이 순간도 꿈이 아닌가 생각했다. 수많은 바람이 만들어 낸 꿈은 아닐까, 그런 염려 때문인지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서 질문을 하게 되었다.




“혜숙 씨는?”

“도착해서 연락했어. 너 만나러 간다고도 말씀드렸고.”

“공연은 많이 힘들지 않았어?”

“아니. 잘 끝났어. 시호가 말 안 해?”

“시호는….”




문득 시호가 다녀갔던 그날, 자신이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깨달았던 그때가 생각났다. 시호가 눈물을 터트린 자신의 앞에서 매우 곤혹스러워했던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환한 웃음을 지어주며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며 행복하게 헤어졌던 것도.




“연락도 없이 와서 좀 놀랐어.”

“어땠는데?”

“즐거웠어. 차 한 잔 마시고 이야기하다가 돌아갔어.”

“그래?”




테이블을 정리하고, 접시까지 식기 세척기에 넣으며 도란도란 함께 하지 못했던 하루의 일상을 공유하듯 말하다가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을 바꾸었다. 다행히도 시호도 그날의 일을 원우에게 말하지 않은 듯 보였다.


널 기다리다가, 네가 아니란 사실에 놀라서 울어버렸어. 당연히 너라는 사람이 내가 있는 이곳을 먼저 찾아와 줄 거라고 믿었던 모양이야. 속에 담긴 말을 결국 하지 못했다. 아직도 다 내어줄 수 없는 제 속마음이 어둡고 초라하기만 한 기분이었다.




“차 한 잔 하고 갈 시간은 되는 거지?”

“당연히. 오늘 안 갈 거니까.”

“응?”




찻잔을 준비하던 재희의 손이 멈추자 원우가 그 손을 이어 이것저것 쟁반에 옮겨 담으며 담담히 대답했다.




“내일 돌아갈 거라고. 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뭐?”

“나 하나 재워 줄 방도 없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원우의 말에 재희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져서 말을 더듬다가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많다. 게스트룸이야 많으니까.




“아니면, 무슨 다른 생각이라도 한 거야?”




빙글거리면서 의뭉스럽게 웃는 얼굴을 잠시 보다가 그제야 재희는 원우가 자신을 놀리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먼저 목을 당겨 끌어안으면 화들짝 놀라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었다. 가끔 아직도 그때의 소년인 줄 착각하는 것은 자신 뿐이었다.




“아니야. 다른 생각은 무슨. 그냥 좀 놀라서.”

“다른 생각해도 괜찮은데.”




찻잔에 담긴 것이 술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자제력이 없었다면 저 묘한 웃음이 걸린 입꼬리에 정말 홀릴 것 같으니까.




“다른 생각보다…, 그냥….”

“그냥?”

“좋아서.”

“좋아서?”

“응.”

“내가?”

“아마… 도.”




자신도 따뜻한 찻잔에 입술을 살짝 대고 눈꼬리만 올리며 되묻는 원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서로를 탐색하는 고양이처럼 경계만 하는 순간, 그런데 그것조차 이렇게 행복하다니….


먼저 눈을 피한 건 원우였다. 내리깐 시선이 흐르고 흘러서 재희의 손 끝에 닿았다. 천천히 내미는 원우의 손을 잡으니 몸이 이끌리듯 옆으로 가 닿았다. ‘폭’ 한 팔에 안겨버린 재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신의 품 안에 가둬버리듯이 꼭 안고 보니 밤의 시작점으로 가고 있는 모든 시간조차 아까웠다.




“재희야.”

“…응.”

“아직도 무서워?”

“…….”

“네가 어디 있든 내가 먼저 찾을 거라고 약속했잖아.”

“…응.”

“네가 추락하면, 내가 잡아줄게.”

“응….”

“그것도 무서우면, 같이 있을게.”

“…….”

“그러니까 혼자라고 생각하지는 마.”

“응.”

“어디에 있어도, 언제라도, 혼자라는 생각만큼은 제발 하지 마.”





재희의 머리카락, 그 끝에 다다라 이르는 얇은 볼, 그리고 턱과 목까지. 지금 손 끝에 닿는 모든 감각들마저 부탁하고 있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그 아까운 시간 속, 원우의 최선을 다한 부탁이었다. 마음은 더 이상 현재에도 과거에도 연연하며 머물러있지 않았다.


혜숙에게 말했듯 원우는 재희가 좋았다. 정말 많이 좋아했다. 세상에서 말하는 감정의 단어라면 그 이상이지만, 본질은 변함이 없다.


원우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재희는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눈을 감았다. 몇 달 동안 온기라고는 찾을 수 없었던 이 시간과 공간의 끝에 결국 유일한 자신의 것을 찾은 듯. 자신이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구명줄처럼, 언젠가 그 새벽에 자신이 원우의 손을 잡고 잠이 들었던 그날처럼.  


꼭 붙잡은 원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한껏 기댄 몸을 그대로 두었다. 어느 때보다 편안한 밤이었다.  



   


-




게스트 룸을 안내하고, 손님용으로 비치되어있던 물품들을 원우에게 꺼내 주었다. 2층 복도 한편 수납장에 가지런하게 정리된 물건들, 마리아의 손길이 닿은 마지막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재희는 고개를 젓다가 뒤에서 제 허리를 감싸안는 원우의 손길에 멈칫했다.


오랜만에 만난 원우는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표현하고, 또 바로 행동한다. 그리워했던 시간만큼 어떻게든 닿고 싶어 하는 서로일까. 재희는 그런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원우의 행동이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울 뿐이었다.




“여기 진짜 조용하다.”

“혜숙 씨 동네도 그렇지 않았나.”

“둘 뿐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아.”

“그럴…, 지도. 다 씻었어?”




습기를 가득 머금은 타인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목덜미에 직접 닿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돌아보니 원우의 젖은 머리카락 위로 수건이 그대로 있었다. 안젤로 때문에 비치해두었던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묘한 표정이었다.


어둑한 조명을 등지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긴장감이 풀린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머리, 말려줘?”

“좋은 생각이야.”



 

재희는 방금 원우가 쓴 욕실로 가서 습관처럼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돌아보니 칫솔을 입에 물고 있는 원우가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 순간들이 이상했다. 눈앞에 당연한 것처럼 자신이 바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생경한 기분이 들어 빤히 쳐다보니 저에게 새 칫솔을 내밀고는 엉겁결에 받아 든 저의 허리를 안더니 욕실 세면대 거울 옆의 작은 협탁 위로 앉혔다.




“뭐야.”

“양치질. 같이해.”

“… 이상해.”

“뭐가 이상해?”

“그냥.”

“양치질 안 하고 자는 게 더 이상해.”




작게 웅얼거리는 재희의 칫솔 위로 치약이 묻고, 곧 입안으로 쏙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칫솔질을 하면서 다시 서로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이 상황이 즐거운 듯 장난스럽게 웃는 원우의 표정에 곧 이상한 기분은 사라졌다. 우물거리며 양치질을 먼저 끝낸 원우가 협탁 위에 앉혀둔 재희를 조심스럽게 다시 내렸다.


양치질을 끝낸 재희의 입가를 꼼꼼하게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는 동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멋쩍게 웃으니 짧은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져주며 그런다.




“적응해. 이제 익숙해져야 해.”

“왜?”

“이런 게 일상이 될 테니까. 나 머리 말려준다며.”




침대 위에 살짝 걸터앉은 채 금방 찾은 드라이기를 제게 내밀고 있는 원우, 그 장면도 낯설지 않으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일상…. 자연스럽게 서로의 시간 속에 ‘우리’가 있는 이런 사소한 일상.


따뜻한 바람에 날리는 원우의 짙은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그런 날들이 앞으로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한국에서 혜숙과 현우의 집에서 함께 보냈던 그 몇 달이 다시 떠올랐다.


무료할 정도의 일상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평온했던 아침과 그 반복되는 저녁이 그리웠다.


다시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우리가.




“한국으로 와.”

“한국?”

“엄마가 같이 지내자고 하셔.”

“혜숙씨가?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

“더는 너를 이렇게 여기 두는 건 싫어.”

“원우야….”




드라이기를 내리고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손 끝이 대답을 못하고 멈추자, 원우는 그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손가락 마디 마다 부드럽게 닿는 감각에 재희가 움찔거리자 그대로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은 이제 더는 조금 전과 같지 않았다. 긴장감을 담은 평온함, 평온함 속의 확신.




“나랑, 우리랑 같이 있어.”

“…….”

“같이 있자.”




긴장감이 아닌, 그 확신.


그 언젠가에도 들었던 말.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말. 자신의 대답은 필요 없는, 구원의 말. 어리기만 했던 그때의 소년은 없었다. 문득 이제 그의 손을 꼭 잡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남은 불안함이, 자신의 삶을 둘러싼 이 모든 불행이 그에게 옮겨가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도 떨칠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 내게 남은 단 하나가 되어버린 너인데. 어떻게 내가 쉽게 너를 잡을 수 있겠어. 어쩌면 앞으로 내가 끝없이 떨어지는 순간 일지도 모르는데, 너까지 떨어트릴 순 없잖아.


그럴 순 없을 것 같다는 말, 지금 그 말을 어떻게 돌려서 해야 할까. 아주 잠시만 회피하면 될 텐데. 또다시 핑계를 찾아 이리저리 생각을 이어갔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하고 싶고, 궁금해.”

“…….”

“전보다 더 걱정되고, 또 보고 싶어.”

“…….”

“이렇게 만나니까…, 정말 어쩔 줄 모르겠어.”

“…….”

“그 정도로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해.”

“…….”

“그러니까 같이 있자.”




손끝마다 닿는 원우의 숨결에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중얼거리듯 하는 그 나지막한 고백이 살갗을 타고 흘러들어와 재희의 마음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손등까지 올라온 입술이 기어이 ‘촉’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고, 반듯하게 저만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확신’이 있었다.


분명한 건 그 눈동자를 보며 지금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길 재주 따위는 재희에게 없다는 것이었다.


도망가야 했다.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그 방법뿐이었다.




“… 좋아하지 마.”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대답하던 재희는 장난인 듯 웃었다. 눈물이 차오를 뻔했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럼 같이 있을게.”




내가 널 좋아할게. 넌…, 그러지 마.


떨리는 마음을, 겨우 문장으로 해냈다. 섞여있는 진심을 삼킬 수는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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