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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Apr 03. 2022

어쩌다 이별 중

| 기억을 걷다 보면, 그렇게….

-




전날 함께 술을 먹다가 다음 날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승철의 벗은 상체였다. 그러면 정한이 늘 ‘찰싹’하고 가볍게 어깨를 때렸다. 그럼 당연하게 승철은 아직 눈도 덜 뜬 상태에서 더듬거리며 정한을 손을 잡아서 제 볼 위에 올려두며 물었다.




“왜 때리는데.”

“몰라. 때리고 싶은 몸이야. ”

“우리 정한이 변태.”

“다 벗고 자는 네가 할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눈 뜨자마자 야해.”

“아…, 몸은 야한데, 정작 아무 짓도 안 해서 심통난 거구나.”

“뭐래.”

“큭.”

.

.

.



그제야 부은 눈을 겨우 뜨고 정한의 얼굴을 마주하며 웃다가 꼭 끌어안아 주었다. 휴일 아침은 늘 그렇게 달콤했다.  


그랬는데….




“…, 젠장.”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공간.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천장에 정한은 제 눈두덩이 위로 팔을 올리고 작게 욕을 내뱉었다. 지난밤에 결국 오피스텔에는 돌아가지 못했나 보다.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필름이 끊긴 적은 잘 없었는데, 근래에 몸 관리 때문에 술을 안 마시다가 갑자기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다.


자신이 또 젓가락을 던졌던가, 그리고 ‘나쁜 놈’이라고 적반하장의 말을 했던가, 그리고 우산 하나로 빗 속을 함께 걸었던 건가….


아직 옆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아서, 정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헤어진 애인’에게 술 취해서 전화하는 것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다. 아예 집에 와서 같이 잔다니….




“일어났어?”

“…….”

“네가 온 거 아니야. 내가 데리고 왔어.”

“…….”

“나도 술 마셔서 직접 데려다 주기 힘들었고, 택시도 안 잡히고.”

“…….”

“계속 말 안 할 거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도저히 그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계속 대답을 못했다. 그보다 또 벗은 상체를 보게 될까 봐, 예전에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그 상황을 지금 ‘이 지랄 같은 순간’에 겪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다.



 


“몇 시야?”

“11시쯤.”

“…….”

“정한아.”

“…….”

“나 좀 보면 안 되냐.”




겨우 화제를 돌려서 자연스럽게 일어나 볼까 했지만, 자신도 지금 그럴 상황이 못된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이 침대 위에서 우리가 서로 마주 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데, 대체. 그리고 무엇보다….




“난 왜 벗고 있는 건데.”

“그거야, 네가 들어오자마자….”

“그만!”




괜히 물어봤다. 정한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승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제야 승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정한을 향해 몸을 돌린 채 옆으로 누워있던 승철은 제 입을 손으로 막고 있는 저를 뚫어져라 보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

“어제는 내가…, 좀 많이 마셔서. 실수했어.”

“…….”

“미안….”




‘실수’라는 말과 ‘미안’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입에 올리고 있는 자신을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지만, 정한은 승철이 다른 어떤 말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질척거리는 이별은 정말 싫었는데, 그 질척거리는 이별을 자기가 스스로 만들고 있는 꼴이라니.




“알았어. 일단 옷 입어.”




잠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승철은 자신의 입술 위에 있던 정한의 손을 천천히 거두면서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뿐이다. 그제야 정한은 벗고 있는 몸을 잊고 있다가 ‘후다닥’ 거리며 이불로 가리고 바닥에 흩어져있던 옷가지들을 대충 끌어당겼다.


정한의 얇은 어깨가 저에게서 등지고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있던 승철은 지난밤이 또 꿈같아서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며 옷을 꿰어 입었다.




붙잡으면…, 있을 거야?




지난밤에 자신이 정한에게 던졌던 물음이 닿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집에 데리고 왔을 때는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침실로 들어섰을 때도, 겉옷을 벗기고 편하게 눕히려고 몸을 기울였을 때도. 그때까지도 승철은 정한이 아침이 되어 다시 정신을 차릴 때쯤, 그 물음에 대답을 해주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승철아….”

“왜? 물 줘?”

“우응….”




침대 위에 정한을 눕히던 저를 향해 뻗어오는 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목덜미를 끌어안더니 입을 맞췄다. 너무 갑작스러웠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이라서…. 그래서 질문에 대한 답은 미뤄두기로 하고 그대로 정한의 손길을 따라갔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몸은 타인의 마음을 따라서 움직일 뿐이었다.


넌 언제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만든 건 결국 나니까.


깊은 밤, 입을 맞추는 순간이 반복될수록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입을 맞추며 서로를 찾는 꿈결 같은 시간 속에 간간히 저를 바라보는 정한의 눈이 정말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맞는지, 현재를 두고 아침이 되면 후회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은 되었지만.


그저 이 순간 취기와 창밖의 빗소리를 핑계 삼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 불안함을 미루었다. 그리고 결국 그 불안함이 현실이 되어 제 옆에 오롯이 앉아있다.




“지금 가려고?”

“응. 갈게.”

“정한아, 저기….”

“미안해,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




단호하게 옷가지를 다 걸치자마자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들어왔던 현관문을 나서려는 정한의 손목을 승철이 기어이 잡았다.




“아직 비와. 우산…, 가져가.”




정한은 손목이 잡히는 순간, 신기하게도 그리고 낭패스럽게도 지난밤의 기억이 불현듯 났다.


침대 위에서 승철의 목을 끌어당겨 안았던 것은 자신이었고, 그 입술을 먼저 찾은 것도 자신이었다. ‘정한아. 괜찮아?’라고 물으며 살짝 저지하려 했던 승철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그런 말을 무시한 채 더 과감하게 셔츠를 벗기고, 자신의 옷을 스스로 벗었던 것까지.


입술이 고팠던 것인지, 아니면 어둑한 공간 안에서 서로만을 찾아 헤매던 그 시간이 그리웠던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욕구불만이었거나.


마지막 생각까지 빠르게 다다르자, 정한은 ‘악!’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다.


그저, 자신은 지금 저를 걱정해주던 승철이 익숙했을 뿐이고, 취기 때문에 그 익숙함이 제 속에서 비죽이 튀어나왔을 뿐이라고. 마른침을 삼키던 정한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하던 것을 겨우 버티며 말했다.




“나 이거…, 이제 못 돌려줘.”

“안 돌려줘도…, 괜찮아.”




승철의 마지막 말이 이상하게 아팠지만, 대꾸해 줄 수 없었다. 결국 승철이 내미는 우산을 빼앗듯이 들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나와버렸다.


이제는 돌려주지 못하는 마음, 제가 먼저 놔버려서 염치도 없어 절대로 찾을 수 없는 마음.


그런데 승철은 안 돌려줘도 된단다. 그냥 그저 모든 마음을 주기만 했던 소중한 자신의 시간을 다시 기억하라는 듯 그렇게 말해버리면…, 어쩌라는 건지.


결국 풀려버린 다리 때문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닫히려는 문을 겨우 다시 열고 몇 걸음 걸어 나왔을 때,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승철이 주었던 우산은 차마 펴지도 못하고 조금 걷다가 빗방울이 점점 커져 결국 펼치고 말았다. 못 보던 우산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보라색’의 우산.


이상하게 여느 때 보다 우산 안의 공간이 매우 넓게 느껴졌다. ‘찰박’ 거리는 발걸음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누군가 ‘훌쩍’ 거리는 소리와 함께 우산 안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정한아! 눈 온다!”



함께 나간 거리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사람이 없었다. 뽀독 소리를 내며 처음으로 발자국을 함께 만들고는 아이처럼 웃는 그 모습을 찍어주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작은 눈덩이가 날아온다. 어느새 저 멀리 떨어져 눈덩이를 뭉치고 있는 정한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한번 더 날아오는 눈덩이를 피하고 걸음을 떼고 쫓아가려 하자, 추울까 봐 씌워준 자신의 빨간 비니와 회색 귀마개를 한 채 혀를 살짝 내밀더니 ‘메롱!’ 하고는 도망친다. 매번 비슷한 장난이지만 매번 그 장난에 넘어가고 반응하는 승철도 똑같다. 빠르게 쫓아가려다 결국 빙판에 엉덩방아를 찍으며 넘어지니, 도망가던 정한이 놀라서 다시 돌아와 괜찮냐고 묻는다.




“아, 아파…, 진짜 아파.”

“어디 부러진 건 아니지? 괜찮아?”

“아… 씨.”

“푸하…. 그런데 너 넘어질 때 진짜 웃겼어.”

“뭐야. 너 때문에 넘어진 건데.”

“표정도 웃겨. 넌 어떻게 매번 나한테 그렇게 당하냐?”




많이 다친 건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그제야 다시 웃음이 터진다. 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질까지 하며 웃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가로등 불빛은 많은 눈발에 희미해졌고 정한의 뒤로 비추는 그 희미하면서도 묘한 불빛이 빨갛게 달아오른 정한의 볼과 대비되어 한없이 예쁘기만 하다.


‘예쁘다’는 표현으로 너무 모자라, 어느새 승철은 정한의 두 볼을 꼭 붙잡고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볼은 차가웠고, 입술은 따뜻했다.




“내가 매번 져 주는 거지.”

“그래, 그런 걸로 하자. 헤헤….”




정한의 손을 잡고 일어난 승철이 그 손을 제 주머니 안에 자연스럽게 ‘쓱’ 집어넣고 다시 가볍게 입술을 부딪친다. ‘닳겠다, 닳겠어.’라고 투덜거리는 말투와 달리 정한은 웃고 있다.


흰 눈이 더 펑펑 내리고 가로등의 하얀 불빛은 뿌연 하늘을 더 예쁘게 만들어 주었다. 내리는 함박눈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 정한의 하얀 목덜미와 조금 길게 자란 금발, 빨간색의 비니, 회색 귀마개. 주머니 안에서 ‘꼼지락’ 거리며 깍지를 끼던 손가락 마디마디와 그 미지근한 온기까지.

.

.

.




잊히는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싫었던 순간도 잊고 싶었던 추억 따위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자신은 아직도 여전히 처음과 같이, 아니 처음보다 더 큰 감정이 되었으니까. 함께 한 시간만큼이나 더 크게 자라 버려서 이제는 지울래야 지울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걸 어쩌란 건지.


‘더 좋은 남자 만나라.’는 말 따위를 들었다면 정말 참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좋아한 건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사랑하고 마음에 두었던 건 오로지 ‘정한’이었으니까. 장담하지만 그가 남자든 여자든 혹은 전혀 다른 생명체였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정작 당사자는 그 마음을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저는 마음을 충분히 주었다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어딘가 부족했던 건지 아니면 그의 마음에 가서 닿지 않았던 건지.


아침부터 기온이 떨어져 창밖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정한과의 기억이, 여전히 박혀있는 자신의 마음이 생각났다.


자신의 마음만큼 이곳도 변한 건 없었다. 약이라도 챙겨 먹으려 일어났다가 문득 정한이 없는 이 공간 안의 시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제부터 몸이 좋지 않아 결국 병가를 냈다. 2년 차도 안 된 사원이 병가를 냈지만 부서는 ‘그래, 그럴 만도 하지.’라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깨달았다. 입사를 한 후 자신이 당연하게 감내했던 ‘고된 시간’이 무엇을 대가 삼아야 했는지를….


혼자만 오롯이 견뎌야 했던 서로의 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정한이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구나.


그런 거구나, 그랬구나,

그래도…, 그렇지만…,

그러지 말지 그랬어, 정한아.


대충 집히는 대로 약을 털어 넣고, 다시 침대 안으로 몸을 뉘었다. 속은 쓰리고, 머리는 아프고, 열이 났다.


제법 견디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버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더는 버티기 힘든 모양이다.




“정한아….”




더는 이곳에 없는 사람의 이름을 공허하게 부르다가, 승철은 점점 깊은 꿈속으로 들어갔다. 눈가에 번져가는 물기가 점점 많아졌다. 이제야, 몇 달 만에 실감이 난 건지도 모르겠다.


꿈에서는 다시 하얀 눈이 내리던 그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한번 더 그날의 너에게 입을 맞추고, 손을 잡고, 또 마주 보며 웃을 수 있을까.


가볍고 경쾌한 익숙한 알림음이 울리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알 수 없을 만큼 승철은 점점 더 꿈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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