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건 좀 어때'
20160925
지하 카페를 나서며 지상과 연결된 철제 계단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문드문 보이던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시간. 좁디좁은 그 네모난 하늘 너머의 시간은 까맣게 멈추어 있다. 카페 문을 잠그고 나서려던 걸음을 멈춘 채, 한 참을 그렇게 좁은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네모난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까만 하늘 너머에 지난밤 보았던 너의 모습이 겹쳐져서 그랬나 보다.
지난밤 꿈에 나타난 너의 모습에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하다 못해 아팠다. 왜 갑자기 너의 꿈을 꾼 것일까.
- “오빠, 비 오면 좋겠다. 그렇지?”
베란다 밖으로 손을 내민 채 말하던 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나는 너를 뒤에서 안으며 그냥 웃었던가, ‘비 오면 뭐가 좋아’라고 말했던가. 누군가의 심장소리였는지 모를 그 소리가 너의 머리에서도, 너의 어깨에서도, 너의 목소리에서도 들렸다. 살짝 닿았던 너의 볼은 아침 커피처럼 따뜻했고, 고개를 돌려 마주친 너의 눈은 비를 뿌려줄 것 같은 하늘과는 반대로 맑기만 했다.
… 모두 부질없는 되새김이다. 괜한 잡념에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떼려는 그 순간.
거짓말처럼 바람이 불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 까만 하늘에 나타난 너의 하얀 얼굴을 보았을 때도, 나는 그 모든 상황들이 꿈인 줄 알았다.
“… 비오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너는 비를 피해서 주춤거리며 건물 쪽으로 움직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짧다면 짧은 그 찰나의 순간에 나도 모르게 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환청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것에 점점 다가섰다. 한 걸음씩 올라가는 동안에도 나와 마주친 눈동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미 자신의 눈앞에 아주 가까이 다가섰음에도, 피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현실임을 깨닫고 걸음이 느려진 것은 마지막 한 계단을 남겨둔 순간이었다. 동그랗게 떠진 그 까만 눈동자를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하고 있다.
“아…, 오랜만이에요.”
“…….”
조그맣게 웅얼거리며 말하는 너의 목소리에서 그때처럼 심장소리가 들렸다. 아마 난, 이런 오늘을 위해서 지난밤 그런 꿈을 꾼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환각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며, 제발 너에게 한 마디라도 하려고. 그런데도 정작 나는 먼저 입조차 열 수 없었다. 너를 보낼 때는 그렇게 쉴 새 없이 나쁜 말만 퍼붓던 나였는데. 또 머리가 아프다.
“… 오빠.”
“…….”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아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생각해 보면, 나는 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 할 말이 없을 뿐 아니라, 너에게 아무런 말도 해서는 안 된다.
- “갑자기 왜 그래요? 네?”
그만 만나자….
그 단순하고도 짧은 한 마디에 순식간에 젖어들던 까만 눈동자가 지금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마지막에 나는 너를 그렇게 보냈었지, 아마.
- “내가…, 뭐 잘 못 한 거 있어요?”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너 질려. 알잖아. 나 원래 뭔가 하나에 오랫동안 관심 못 주는 거. 너는 제법 오래 간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는 거야. 앞으로는 너도 내가 그동안 못 해줬던 거 다른 사람한테 많이 받고, 사랑받으면서 살아. 나는 그런 거…, 앞으로도 해줄 자신 없으니까.
- “난 괜찮아요.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해줘도, 나는….”
내가 싫어. 너 이러는 거, 이제 내가 싫다고. 그리고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잠깐 동안은 재미있었어. 너 같은 애랑 사귀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으니까. 너는 가끔…, 귀엽기도 했고, 덕분에 따분하지 않은 시간이었어. 그런데 이제는 너…, 불편해. 내가 불편해서 안 되겠어. 난 불편한 거 딱 질색이야.
“오…, 오랜만이에요.”
- “내가…, 불편해요?”
“……응.”
- “나는 오빠한테 아무것도 바라는 거 없어요.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그래도…, 불편해요?”
“잘…, 지냈어요?”
- “하나만 물어볼게요. 나는 한 번도…, 오빠한테 단 한 번도 사랑이었던 적 없어요?”
“…응.”
사랑? …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넌 그냥 처음부터 아주 불편한 존재였어. 처음에는 마냥 재밌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귀찮고, 질려. 성가시고, 불편해. 그뿐이야.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요.”
“…….”
“그…, 집에 가는 길인가 봐요.”
“……응.”
“아…, 제가 괜히 또 귀찮게 했나 봐요.”
“…….”
울리는 목소리에 예전의 장면들이 겹쳐져서 한 참을 제자리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자꾸만 그 날의 너와 내가 말했던 것들이 들려서, 울먹이던 너의 마지막 질문에 그저 차갑기만 했던 내 대답이 울려서 머리가 아팠다. 죄어오듯이 머리가 계속 아파오는 것 같아서 미간이 찡그려진다. 결국 한 계단을 사이에 두고 나와 시선을 마주하던 너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조용히 그 눈동자를 쫓는 나를 애써 모른 척하면서 한 걸음 옆으로 비켜준다.
그날의 너처럼….
울먹이는 목소리로 했던 그 질문에 대한 내 마지막 대답, 그리고 내 앞에서 한 걸음 비켜주던 너의 모습처럼.
“… 그럼, 잘 가요.”
- “그래도…, 그래도 나는…. 고마웠어요. 나는…, 아직 사랑해요. 오빠는…, 아니었다고 말해도, 나는…, 나는요….”
그만 해. 다시는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게 좋을 것 같아….
그 날, 그 마지막 말을 하고 너의 옆을 지나치면서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지금의 나처럼, 걸음만 바쁘게 해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머리가 계속 아파온다. 자꾸만 미간이 찌푸려지다가 결국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빗물 때문인지 자꾸만 눈앞이 어지러워진다. 너무 뿌옇게 흐려져서 결국 가던 길을 잠시 멈추어야 했다.
“… 차를…, 어디다가 세워 뒀더라.”
갑자기 숨도 차오른다. 머리가 아프더니 이제는 이상증세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손으로 볼을 닦아 보았다. 맑은 물기가 가득하게 맺혀있다. 한 참을 제자리를 돌고 돌면서도 바보같이 눈앞에 있던 차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운전석에 올라타 천천히 키를 꽂고 히터를 켰다.
아직도 비가 많이 내리는 모양이다. 내 볼에 여전히 흥건한 것을 보면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은 채 차 안에 앉아서 나는 무엇을 하는가. 여전히 건물 옆에 서 있는 너의 모습이 빗방울에 일그러지다가 말다가를 반복한다. 아주 잠깐, 내가 미친 척 다시 너에게 가서 무슨 말이라도 할까를 고민한다. 하지만 곧 그 멍청한 생각은 버린다.
잠시 후, 너의 앞에 멈춘 차. 거기서 급히 내리는 한 사람은 우산을 들고 너에게 간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걸까, 너는 또 그 사람에게 웃어준다. 너의 웃는 얼굴은 빗방울에 일그러지는 유리창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또렷하게 보인다. 다독이는 손길이 다정하다. 너를 조심스럽게 우산 안으로 데리고 가는 그 사람의 손길은 더 다정하다.
그래서…, 그래서 정말 다행이다.
다시 생각해 보더라도, 나는 너에게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을 뿐 아니라, 너에게 아무런 말도 해서는 안 된다.
가끔 발견되면 버리지도 못하고 곱게 모아두는 너의 머리끈.
아직도 우리 집 욕실에 곱게 놓여 있는 너의 노란 칫솔.
언젠가 술에 취해 너에게 뽑아 주었던 곰돌이 인형.
습관처럼 사지만 정작 나는 먹지 않아서 유통기한이 지난 코코아.
비가 올 때마다 사 들여 색깔별로 있는 일회용 비닐우산.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
아직 남아있는 너의 모든 흔적들이 결국 사랑이었다고 끝내 말할 수 없어서…, 내가 너에게 하지 않은 말들이라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안 아팠을 리가 없겠지
그렇게도 감당하기 힘든 못된 내 말들이
거울 속에 비친 나에게
내가 했던 말 그대로 해보면서 생각했어
참 내가 한 말이지만
너무 했다 싶다가
문득 너무 미안해졌어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이미 네 곁에 누군가 있는데
아픈 건 좀 어때 어때 어때
물어보고 싶지만
널 아프게 만든 게 나니까
그 사람은 어때 어때 어때
사랑받아야 하는데
다친 가슴이 나아야 하는데
누구보다 널 아꼈던 나
그런 내가 네 가슴에 상처낼 줄 몰랐어
난 네가 싫었던 게 아냐
네가 말한 모자란 날 인정하기 싫었거든
당연한 줄 알았던 네 전화도 입맞춤도
이젠 내게 소원 같은 것
아프지 말아 제발 내 말들 잊어 제발
흉터처럼 네 맘에 아직 내가 있으면 안 되는데
하루하루 어때 어때 어때
곁에 있고 싶지만
혼자 있게 만든 게 나니까
그 사람은 어때 어때 어때
사랑받아야 하는데
널 혼자 두지 말아야 하는데
애즈 원 (As One) -아픈 건 좀 어때- 중
노래를 듣다가 예전에 쓴 글이 문득 떠올랐다.
그와 비슷하게 다시 써봤지만, 끝내 다른 결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