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의 짧은 이야기

'아직, 있다.'

by Kidcat혜진

20161124





오늘 아빠는 검은색 양복을 찾아 꺼내셨습니다.


내가 조금 더 어릴 때, 그때의 아빠가 검은색 잠수복을 챙겼던 것처럼.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저 넥타이를 매만지던 아빠는 한 참 거울을 보다가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내게 손을 내미는 아빠가 조금 낯설었습니다. 곁에 있던 엄마는 내 등을 밀며, 조그맣게 속삭입니다.



-어서 가. 오늘 아빠 손 꼭 잡아드려야 해. 알았지?



아빠의 손은 내 손보다 훨씬 크고 두껍습니다. 내 작은 손은 아빠의 손바닥 사이로 숨겨집니다. 괜히 머쓱해진 내가 몸을 꼬면서 배시시 웃자, 아빠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그제야 작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는 꼭 잡은 손 그대로 아빠와 함께 문을 나섭니다.


자동차를 타고, 거리를 지납니다. 낯선 건물, 하얀 꽃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우는 사람과 웃는 사람들 사이로 사진이 보입니다.


나는 아빠의 오랜 친구를 그 사진에서 봅니다. 아빠는 두 번 절을 했고, 나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합니다. 사진을 향해서 멀뚱하게 서 있다가 나는 예전에 할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두 번 절을 했습니다. 아빠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창백하지만, 내가 하는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들은 하나도 알 수 없는 것들이라서 나는 이 장소가 지루합니다. 풀냄새가 나는 하얀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꽃들은 아주 많은데 꽃향기는 없습니다. 웃는 사람도 있지만, 우는 사람들도 많고, 왔다가 급히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빠처럼 그 자리에 앉은 채 한 참을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아빠의 곁에서 아빠를 지킵니다.


아빠가 까만 잠수복을 챙겨서 나간 후, 한 참 동안 집에 오지 않았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아빠와 내가 자주 가던 바다에는 커다란 배가 빠져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큰 배가 그 바다에 빠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루 종일 텔레비전 화면에는 그 장면이 나왔습니다. 아빠가 왜 집에 돌아오지 않는지 묻는 나에게 엄마가 그랬습니다.




-아빠는…, 우리를 지키러 가신 거야.

-엄마랑 나는 여기 있잖아.

-거기에도 수많은 우리가 있거든.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지만, 나는 엄마에게 더 묻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얼굴이 창백했고, 나를 끌어안는 엄마의 몸이 많이 떨렸으니까요. 괜히 엄마를 슬프게 한 것 같아서 나는 다시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참 후에 아빠는 너무나 지치고 아픈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아빠가 낯설어서 나는 한 동안 아빠의 곁에 가지 못했습니다. 아빠도 나에게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밤마다 나쁜 꿈을 꾸는 아빠와 그런 아빠를 곁에서 지켜보는 엄마. 그리고 어느 날 자다가 깬 내가 울음을 터트리자 나를 달래던 아빠는 결국 나와 함께 울었습니다. 나보다 더 많이 울던 아빠를 보며 나는 울음을 멈춘 채 아빠의 등을 토닥거려주었습니다.


그 날의 울던 아빠, 다시 나처럼 아이가 된 것 같았던 아빠는 한 참 후에야 겨우 다시 나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아빠 곁에서 밥을 먹고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다가 보니 어느새 나는 다시 자동차에 앉아 있습니다. 환한 낮에 왔는데, 다시 해가 뜰 때가 다 되어 갑니다. 조금 전에는 아빠의 핸드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이제 곧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도 한 참을 기다렸습니다. 지루하지만,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아빠는 내가 지켜드려야 하니까요.


짙은 풀냄새가 잔뜩 베여버린 아빠의 검은색 양복을 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물었습니다.




-아빠, 이제 바다 보고 싶지 않아요?

-… 왜, 갑자기?

-예전에는 아빠랑 바다에 같이 갔었는데, 요즘은 안 간 것 같아서요.

-그래, 그랬구나. … 그랬어.




운전대를 잡고 있던 아빠는 조그맣게 중얼거립니다. 집이 보이는 골목길 어귀, 우리를 발견한 엄마가 손을 흔들며 그곳에 서 있습니다. 차를 세우고도 한 참을 내리지 않은 채 있던 아빠는 다시 나에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친구와 약속을 했어.

-무슨 약속이요?

-우리를 지키겠다고. 아빠 친구도 아빠와 같이 바다에 가서 그 약속을 지키려고 했어. 그런데 그 바다는 너무 슬펐고, 결국 병을 얻어서 영영 떠나버린 거야. 그러니까 이제 아빠는 그 약속을 더 열심히 지켜야 해.

-그럼, 아빠는…. 이제 바다에 가면 슬퍼요?




혹시라도 아빠가 다시 슬퍼할까 봐, 그래서 그 날처럼 또 어린아이가 되어 울어버릴까 봐 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전에는 바다에 가면 웃음이 많아지던 아빠였는데, 그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슬퍼졌습니다.




-아니, 아니야. … 이제, 괜…찮을거야.




그렇게 말하며 안전벨트를 풀어주던 아빠가 나를 꼭 끌어안습니다. 나도 아빠를 꼭 안아줍니다. 어쩌면 지금 아빠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안아주고 있는 나의 아빠는 아직도 괜찮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다에 가면, 내가 아빠를 지켜줄게요.

-아니야, 그냥…, 인사 하자. 우리는 잘 지낸다고. 누구에게든, 꼭 인사하자.

-그래요, 알았어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아빠.




아빠의 손은 내 손보다 훨씬 크고 두껍습니다. 내 작은 손은 아빠의 손바닥 사이로 숨겨집니다. 하지만 그만큼 아빠의 슬픔 또한 나보다 훨씬 크고 더 깊은가 봅니다. 지금 나는 아빠를 안아드려야 합니다. 차창 밖에서 엄마는 끌어안고 있는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얼른 내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빠를 더 안아드리라 손짓합니다.


예전처럼, 예전처럼….


햇빛을 머금고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맞춰서 아빠가 웃고, 엄마는 반짝이는 모래사장 위를 걸으며 나를 향해 손짓하고, 나는 지칠 때까지 해변을 따라 달리고 또 달리다가 바다를 향해 인사하는 날. 그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 날은 누구에게든 행복한 인사를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바다에 가면 꼭 인사를 하렵니다.

아직, 이곳에 있는지요.

아직, 눈물이 나는지요.

아직, 잊지 못했는지요.

아직, 괜찮지 않은지요.


그리고 다시 인사를 하렵니다.

우리는, 이곳에 있다고.

우리는, 눈물이 난다고.

우리는, 잊지 못했다고.

우리는, 괜찮지 않다고.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축 처진 어깨를 하고
교실에 있을까

따뜻한 집으로
나 대신 돌아가 줘
돌아가는 길에
하늘만 한 번 봐줘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루시드 폴 -아직, 있다- 중





무너지지 않고, 살아내고 있는 지금의 나와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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