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꽃잎이 날리면 돌아와 주렴.
20170323
먼지가 뿌옇게 가라앉은 벽면을 만지는 할배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한 참을 그렇게 벽면을 따라서 걷던 할배는 결국 어느 부분을 짚어내더니, 곧 그곳을 두드리고 또 두드려 깨트리기 시작했다. 뭉치가 되어 나풀거리는 먼지와 벽면에서 부서져 내리는 콘크리트 조각들이 할배를 공격하듯 때렸지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아침에 배급받은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할배를 지켜보았다.
해어진 옷과 대조적으로 단단한 손에 억세게 망치를 쥐고, 한 곳만 내리치는 할배를 보고 있다가 다리가 아파서 쪼그리고 앉는다. 왜 저런 일을 하는지 알고 있으니, 묻지 않는다. 일단 먼지가 너무 많이 난다. 그렇지 않아도 미세먼지 때문에 힘든데.
- 조금만, 기다려라.
- 응.
- 여기서 벗어나야지.
- 알았어.
- 너만큼은 여기 있으면 안 된다.
매일 들었던 말. 박자를 맞추듯이 망치를 내리치면서 할배는 나에게 소리쳤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안다.
처음부터 저 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빠와 엄마가 나를 할배에게 맡기기 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저 벽이 만들어졌다. 할배가 젊은 시절에는 낮은 울타리 정도였고, 그 너머에 있던 사람들과 이쪽의 사람들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가끔씩 다툼은 있었지만, 모두는 그렇고 그런 날들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소한 오해가 생기고, 작은 다툼이 벌어지고, 곧 큰 다툼으로 이어졌다.
아니야, 맞아. 맞아, 아니야. 그럴 거야, 그렇게 했대, 그렇게 한 거야. 그들이 그렇게 했다는 거야? 잘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을까. 그럴 거야. 맞아, 그럴 거야. 그렇지, 그럼. 우리는 아니니까. 저들이 그랬을 거야. 누가 그랬겠어. 나는 이런데, 너는 안 그렇잖아? 그건 거짓말이야. 진실이 아니야. 사실이 아니야. 내 말이 진실이야. 너의 말을 처음부터 거짓이야. 아니, 사실은 너부터가 거짓인 거야. 이유가 뭔지 알아? 넌 거짓말 그 자체니까. 우린 믿지 않을 거야. 나는 믿지 않을 거야.
그래서 너는 누구야? 아, 그래. 맞아, 너는 ◯◯야. 그게 너야.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말을 믿었고, 또 누군가의 생각을 퍼트렸다. 사실은 거짓이 되고, 진실은 어딘가에 묻혀버리거나 벽에 가려졌다. 분명 자신의 이름이 존재하였지만, 이미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뀐 것을 알았을 때. 그때서야 할배는 무언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타인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할배는 소름이 끼쳤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 그때 난 그 이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어.
- 왜?
- 그렇게 말하면, 난 그들과 다른 사람이 되니까.
- 무서웠던 거야?
- 사실은 그랬어. 겁이 난거지. 그래서 그냥 그들이 부르는 대로 내버려뒀어.
- 그래도 할배는, 할배잖아.
- 아니, 그때 내 이름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였어.
- 아무튼 할배는 계속 스스로를 생각해 냈잖아.
- 아니야. 난 거짓말에 나를 묻어버린 거야.
- 그래서 지금이라도 파헤치려는 거야? 묻어버린 스스로를?
할배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때부터 틈틈이 이렇게 높아진 벽면을 살피며 구멍을 낼 생각만 했다는 사실을.
낮았던 울타리는 철조망이 되고, 높은 벽이 되고, 더 높은 담이 되고, 결국 끝도 없이 높아져서 마치 우리는 스스로를 가둔 꼴이 된 거야. 건너편의 말들은 이제 들리지도 않는 거지.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꽃도 사고, 옷도 사고, 비누도 사고, 노란 리본도 사고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곳이 없어. 할배는 묻어버린 스스로를 다시 파헤치듯이 벽을 부숴 구멍을 뚫으며 끊임없이 나에게 말했다.
- 나 같은 아이들도 많았어?
- 많았지, 예전에는. 그런데 벽이 생기고 빠르게 줄어들었어.
- 바다 위의 배를 탄 아이들처럼 말이지?
- 그래, 맞아.
많은 아이들이 있었어. 그때의 벽은 아직 얇고 낮았지. 어느 날 사람들 사이로 눈먼 여왕이 다가와서 물었어. 저기 바다에는 뭐가 있느냐고. 사람들이 말했어. 저기 바다에는 아이들이 탄 배가 있다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배라고 말했어. 하지만 눈먼 여왕은 볼 수 없었어. 그래서 사람들에게 다시 말했지. 난 저들이 바다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사실은 바다 위의 배 같은 건 없는 것이 아니냐고. 처음에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던 사람들은 점점 지쳐갔고, 그들 중 누군가가 여왕에게 다시 말했어.
맞아요. 사실 바다 위에 아이들이 탄 배는 없어요,라고 말이야.
눈먼 여왕을 위해서 거짓을 사실로 바꾸고, 진실을 가려버린 거야. 눈먼 여왕은 그제야 만족한 듯이 웃었고, 그들에게 바다로 가라고 말했어. 저 멀리 바다에서도 자신을 향해서 환호하는 그들의 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여왕의 깃발을 펄럭이며 사람들은 바다로 향했지. 하지만 아직 바다 위의 배가 보이자, 그 사람들은 눈먼 여왕에게 거짓말이 들통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아이들이 육지로 돌아와서 자신들의 거짓말이 들킬까 봐 걱정한 거야. 그래서 그들은 정말 바다 위의 배를 지워버렸어.
그렇게 아이들은 영영 육지로 돌아오지 못했어.
내 머리핀 위의 너덜거리는 노란 리본을 다시 기워주며 할배는 말했었다. 나와 같은 아이들이 그 이후로도 사라지는 일들은 자주 발생했다. 그들은 종종하던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고, 눈먼 여왕은 그들의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며 한 없이 웃기만 했다. 늘어나는 거짓말만큼 배급은 교묘하게 줄었고, 부모는 아이들을 버리고 때리고, 학대하며 그 위험한 시간들을 힘겹게 보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하고 거짓된 믿음만이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힘이 없는 어린아이들은 어느덧 사라지고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은 희귀하기는 하였지만, 존귀하지는 않았다.
- 왜 우리 엄마 아빠는 그렇게 일찍 돌아가신 거야?
- 이 벽을 부수다가. 네가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되니까.
- 그냥 지금 여기서 할배랑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 아니야, 아니야. 잘 봐. 지금 내 손에 뭐가 있어?
망치질을 멈춘 할배는 잠시 땀을 닦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상처투성이의 투박한 손, 그 손을 나에게 펼쳐 보인다. 땀에 젖은 손바닥에는 자잘한 실금 같은 것들만 가득하고, 굳은살만 박여있다. 이름을 잃은 할배에게 지금 남은 건, 그 손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나뿐인 것이다.
- ……아무것도.
- 맞아. 여기 가만히 있으면 결국 너도 이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뭔가 변화가 있어야 되는 거지.
- 벽을 뚫는 건 변화야?
다시 나를 멀리 떨어지게 한 후 벽으로 다가가 망치질을 새롭게 시작하는 할배는 중얼거리듯 나에게 말했다.
- 아마도. 지금 너에게만큼은.
이제 이곳에서는 밤을 낮이라고 속여도 믿을 거야. 낮을 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지.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이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할배는 나에게 말했다. 이제 나와 같은 어린아이들은 찾기 힘든 이 벽 안의 공간에서 벽 너머로 가기 위해 할배는 계속해서 망치질을 하였다. 사실은 저 벽을 모두 부수고 싶지만, 이미 할배에게 그럴 힘은 없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그 벽을 뚫고 넘어가서 나와 같은 아이들과 또 좀 더 나은 사람들과 함께 반대편의 벽을 부수고, 다시 이곳에 진실을 가져와 달라고 말했다.
벽면을 손상시키면 분명 깃발을 등에 꽂은 사람들이 달려와서 괴롭힌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할배는 이 작업을 매우 조심스럽게 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조금씩. 내가 사탕을 살살 녹여서 깨트리지 않고 먹는 것처럼. 모두가 눈먼 여왕을 위해 깃발을 들고 환호하는 시간을 택하여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한 밤중에 야금야금, 벽면을 갉아먹는 쥐처럼.
와아!
쾅!
와아!
쾅!
와아! 와아!
쾅! 쾅!
환호소리에 대꾸하듯이 망치질은 계속되었다. 오늘따라 여왕을 위해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 모양이다. 조금 전 여왕의 동상이 세워진 광장에서는 한 떼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아직도 연신 구호와 외침이 이어지고 있다. 모두들 넋이 나간 듯이 한 곳만 바라본다. 그리고 소리만 지른다. 반나절 동안 그것을 반복한다. 아침에 받은 배급이 적었으니, 저녁을 많이 주는 걸 기대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환호하는 만큼 돌아올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지도.
그들의 환호에 맞춰서 마침내 벽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할배는 그 너머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구멍 너머로 작은 꽃 잎 한 장이 날려 들어오고, 그것을 신호삼아 할배는 나를 안아 들었다. 이제야 눈먼 여왕의 깃발을 든 사람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가라, 얼른. 내가 벽의 구멍을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할배는 나의 다리를 마지막까지 받쳐주었다.
벽 너머의 세상을 할배에게 말해주고 싶다. 사실 할배의 손을 잡고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할배는 그들의 세상에 남아있는 것을 택한다.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한다. 비록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의 손을 발판 삼아 내가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뎠지만, 그것은 변화일 뿐 아직은 더 나은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저 이렇게 힘들게 넘어온 변화가 좋다고 할배에게 말해줄 수 있도록, 벽 너머의 세상은 그 전의 세상보다 훨씬 낫다고 이야기해 줄 수 있도록, 나는 착지하는 다리에 다부지게 힘을 준다.
노란 꽃잎이 날린다.
벽 너머의 세상,
이곳에서 처음 보내는 계절은 봄이다.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봄.
잊지 않을 테니, 꼭 다시 돌아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