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漠然)

어느 날의 그를 보았다

by Kidcat혜진

20171203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딱히 정확한 증거를 꼬집어 말하라고 한다면 그럴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어느 날의 누군가를 부르는 그의 표정을 봤을 때, 그럴 것이라고, 아주 아주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가, 어느 날의 누군가를 부르던 목소리와 표정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아, 좋아하는구나. 저 사람.

그것도 아주 많이. ……그를.


라디오가 흘러나오는 교내 방송이, 떠들썩한 농구장의 외침이, 지나가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깔깔거리며 떠들어대는 목소리들이, 휘몰아치는 바람과 떨어지는 낙엽들의 몸부림조차, 그의 배경에는 없는 것처럼.


오로지, 그의 목소리에 실려 있는 그 이름만이 그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만의 표정으로

그 누군가를 부르며,

그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 그랬었구나.


하지만 그뿐이었다. 찰나는 수많은 찰나들 속에 묻혀서 어차피 상관없는 그의 마음은 그저 몸부림치며 내 발에 밟혀버렸던 이름 모를 낙엽처럼, 그 날의 어딘가에 잊혔다. 그는 나와 말을 섞은 적도 없는 선배였고, 내 마음과는 너무 다른 세상의 그가 나의 세상과 부딪칠 일 따위는 없었으니까.


언제나처럼,

필요한 찰나만 순간의 기억으로 남겨져 보관될 뿐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오늘.

그 찰나의 순간이 왜 기억이 났는지 모르겠다.


십 년도 더 지났던 그 막연한 찰나가,

그 순간의 기억이, 밟혔다 믿었던 낙엽이,

알고 보니 내 책장에 꽂혀 있던 책 사이에서 발견된 것처럼.

문득 화들짝 놀란 내가 다시 그를 바라봤을 때도,

그는 그만의 표정으로 우뚝 앉아 있었다.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이미 끝난 고인에 대한 위로 외의 이야기들로 두런두런 거리는, 이 낯설면서도 영원히 적응할 수 없는 공간.


그는 그저 앉아 있었다. 구석진 자리도 아니고, 시선을 끄는 중간 자리도 아닌 애매한 그 공간의 탁자에. 장례식장에 있는 듯 없는 듯, 그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유령이 앉아 있는 것처럼, 고인이 된 사람이 민망할 만큼 그는 고인보다 산 자의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한결같이 영정 사진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선으로 그어진 딱딱한 검은색을 지워내고 나면 그저 누군가의 증명사진으로 보았을 밝기만 한 얼굴의 누군가를.


사진 속의 누군가는 저기 앉아 있는 나이 든 여인의 자식이었고, 지금 음식을 나르고 있는 여인의 남편이었다. 그랬다. 그랬었다.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저기 작디작은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은 슬프지만 과거였고, 잔인한 현재이기도 했다.

마치 먼 미래에 혼자 와 있는 것처럼, 낯설고 생경한 풍경이었다.

아주 예전에 내가 버렸던 그 찰나를 다시 떠올린다면, 이 모습은 있을 수 없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 검은 양복을 입고 오롯이 앉아있는 그가 저 사진 속의 그를 불렀을 때.

그 찰나의 막연함에 내가 깨달았던 또 다른 사실은.



아, 좋아하는구나. 저 사람도.

그것도 아주 많이........ 그를.



앞에 있는 마른안주를 씹으며, 오랜만에 입은 검은 정장의 주름을 한 손을 매만졌다. 막연하게 떠오른 그 장면과 쓸데없이 튀어나온 감상을 씹어 삼켰다. 맑은 액체를 말없이 마시며, 오랜만에 만난 자리가 이런 자리라며 머쓱해하는 선배와 동기들의 말을 듣는 척했다.


그와 그.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세상에서는 하나뿐이었을 그 순간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그와 그 순간을 함께 했다고, 그 찰나를 내가 증명해 줄 수 있다고. 막연하지만 나는 당신과 그를, 그와 당신의 공간에서 무언가 느낄 수 있었다고. 그러니까 만일 당신들의 세상이 지금 어디에도 없다고 믿는다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주 잠깐 동안.


……주제넘는다.


나의 세상은 어차피 그와 닿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그 들의 세상에 나는 없을 테니까.

지금 내가 그와 그를 증명해 준다고 한다고 해도 무언가가 달라질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저기 앉아있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는, 그때 내가 봤던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때의 그는 사라지고, 지금의 그는 그저 나처럼 잠깐 동안 찰나를 곱씹으며 앉아 있는 것일지도.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문 쪽으로 걸어 나가며 그의 어깨를 살짝 잡아 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그대로구나. 이 사람.

그래서 슬프구나....... 지금.



자신의 어깨를 내가 잡아준 걸 모르는 듯,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계속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은 듯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나는 얼른 자리를 떴다.


어차피 이런 막연함이란,

이런 찰나의 감정이란,

곧 지나갈 순간의 조각일 뿐이니까.





사람의 찰나가 막연하기만 한, 그런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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