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절망을 바라는 나에게’
선생님,
달이 밝으면 피는 꽃을 아세요?
그믐이나 초승달이 뜰 때는 보이지 않는 꽃이에요.
이상하죠, 밤에 피는 꽃이라니.
그것도 밝은 보름달이 있는 날에만 얼굴을 보이는 꽃이라니.
예전에 제가 살던 동네에는 그런 꽃이 있었어요.
달빛이 환한 어느 날의 밤이면 그 꽃을 보러 밖으로 나갔어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에 하얗게 떠오른 달이 보기 좋기도 했고,
오늘 또 그 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설렘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밤이면 그렇게 밤 외출을 했어요.
걷는 걸음걸음마다 하얗게 뿌려주는 달빛이 앞을 밝혀주어서
어둠이 하나도 무섭지 않은 밤에만 그렇게 나갈 수 있었어요.
그렇게 밤 외출을 하는 날이면, 그 꽃을 운 좋게 볼 수 있을 때가 있었지요.
그 꽃은 절벽 가까운 곳에 항상 자리했어요.
맞아요, 늘 위험했어요.
달이 밝아서 망정이지,
조금만 걸음을 잘못 떼면 위험할 수도 있는 곳 말이에요.
그래도 그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어요.
선생님도 그 꽃을 보셨다면, 분명 그런 위험한 밤 외출을 했을 거예요.
그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니까요.
그 날의 하얀 달은 절벽 근처에 그 꽃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 아름다움을 나 혼자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더 두근거리게 했죠.
달빛을 밟고 한 걸음 한 걸음, 그날도 저는 그렇게 그 꽃을 보러 갔어요.
그런데...,
더 이상 그 자리에는 그 꽃이 없었던 거예요.
저만의 아름다움, 저만의 설렘, 저만을 위해 존재했던 그 꽃이 더는 없었어요.
그 순간의 실망감은..., 어느 정도였냐고 물어보신 거예요?
그 날 하얀 달빛에 제 얼굴이 보였다면 아마 울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 정도였냐고요?
네, 고작 꽃일 뿐인데 말이에요.
남들이 보기에는 고작 꽃일 뿐이었지만,
저에게는 아니었으니까요.
하얀 달이 뜨는 밤이 한 해에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밤이어야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으니까요.
저만 알고 있는 소중함이었다는 것도 중요해요.
그래요, 그게 가장 중요한 점이었어요.
누구도 알 수 없는 아름다움.
나만 알고 있는 사실.
그래서 누구도 알면 안 되는....
사라진 꽃의 자리에는 누군가가 꽃을 꺾어서 짓이겨진 흔적만 있었어요.
완전히 사라진 생명을 제가 살릴 수는 없었죠.
하얀 달 빛이 내려앉은 그 밤,
꽃이 있던 그 자리에서 한 참을 서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어요.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죠?
그런데 저는 아직도 가끔씩 기억나요.
하얀 달 빛을 밟고 한 걸음, 한 걸음.
그런 밤에만 피어나는 나만의 아름다운 꽃을 보러 가던 그 길이 말이에요.
그 꽃을 볼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그 순간을....
이제 더는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 날의 기억은 저만 알 수 있겠죠.
아무리 말씀드려도 모르실 거예요.
그쵸?
맞아요, 누구도 그때의 제 기분을 알 수 없을 거예요.
아, 혹시 모르죠.
아름다운 꽃의 씨앗이 남아서 다시 피어있을지....
그 꽃은 아직도 절벽 위에서 피고 있을지도 몰라요.
누군가가 보러 와 주길 바라면서 말이죠.
짓이겨버린 사람이 아무리 미워도 또다시 보러 와 주길 바랄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 그 꽃을 꺾어버리고 짓이겨버린 사람이 저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왜요? 선생님은 늘 저를 그렇게 보시는 것 같아요.
그냥 방금 생각난 제 옛날이야기예요.
밖을 보세요, 오늘처럼 달이 밝은 날은 잘 없어요.
그래서 그냥 생각난 이야기를 해 본 건데....
아, 죄송해요.
고개를 돌려드려야 하는데, 불편하게 계셨네요.
이제 잘 보이시죠?
오늘은 진짜 달이 밝아요, 그쵸?
오늘도 그 꽃이 피었을 것 같아요.
그럼..., 이제 그 꽃을 꺾어버릴 차례인 것 같네요.
선생님은 정말이지..., 제 이야기를 너무 잘 들어주세요.
괜찮아요, 선생님.
이건 저만 알고 있을게요.
선생님이 제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처럼,
저도 선생님 이야기 하나 정도는 간직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아까도 말했지만...,
어떤 사람도 지금 제 기분을 알 수 없을 거예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선생님, 네?
잘 안 들려요....
그런데 선생님,
아직도 제 말이 들리시나 봐요?
-
당신의 절망을 바라는 나에게
그대는 그리 친절하진 않군요
간절히 바라는 것들은 언제나
그렇듯 끝내 이루어지지 않아요
난 오늘도 또 하루를
마치고 기도하죠
날 위로하지 않길
날 이해하지 않길
날 용서하지 않길
날 구원하지 않길
시간은 내게 아무런 표정 없이
오 내가 모두 틀렸다고 말해요
당신의 절망을 바라는 내 맘이
그 무엇도 원하지 않길 바래요
못 (Mot) -당신의 절망을 바라는 나에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