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 (Kind)’
답안지를 보다가 영어가 가득한 그 한 장을 쭉 찢는다.
순식간에 잘려나간 부분은 뒷 장의 영어에 밀려 티도 나지 않았다.
미간을 손으로 한번 만지작 거리다가 찢어진 답안지를 곱게 접어 종이학을 만들었다.
찢고 접고 다듬는 동안 시간은 3분 정도가 흐른다.
11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지금이면 될 것 같다.
아니다, 오늘은 그냥 가는 편이 좋겠다.
가방을 정리한 후, 독서실을 나선다.
몇 걸음 가지 않았지만 결국은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발걸음을 다시 돌린다.
주머니 속 휴대폰은 언제나처럼 만지작 거리기만 하고 있다.
늘 멈춰 선 전봇대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작은 돌 부스러기 같은걸 하나 찾아 창문으로 던진다.
이윽고,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이 울리고 통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야!!! 내가 내방 창문에 돌멩이 던지지 말랬지!?’
오늘도 너의 터지는 목소리가 시원하다.
차나 마시자니까, 미쳤냐는 소리만 되돌아온다.
아침에 얼굴 붓는 것을 걱정하는 너를 위한 제안이지만 먹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것을 제안해야 한다.
결국 ‘떡볶이’라는 말에 반응을 보이더니, 대문 앞에 얼굴을 내민다.
롱 패딩으로 무장을 하고 나타난 너는 그 와중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귀엽고 깜찍한 양말까지.
완벽하네. 역시, 너다.
섞여 있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한다.
그러려면 공부만큼 좋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찾은 방법이 너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독서실’과 ‘공부’라는 말에 ‘미친눔’이라는 말만 들었다.
그냥 웃는다.
그런 말을 듣고도 웃음이 나는 걸 보면 내가 정말 너를..., 너를....
아니다.
이젤 앞에 앉아 하루 종일 고생하고 있는 너만큼 내가 힘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너와 내가 ‘우리’라는 말을 쓸 때까지 조금은 더 기다려 줄 수 있다.
토끼가 귀엽게 그려진 수면 양말을 뽐내기 위해 한쪽 발을 살짝 올리더니
‘나처럼 짱 귀엽지?’라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어색하게 그냥 있었다.
넌 내게 정색한다고 했지만, 분명히 정색은 아니다.
그런 말에 앞으로는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지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공부보다 어려운 너에 대한 고민이 하나 더 늘었다.
너랑 할 이야기가 많지만, 내 감정을 쉽게 드러낼 말을 찾는 것은 늘 어렵다.
넌 우리 사이가 새삼스럽지 않은 사이라고 하지만,
난 그런 우리 사이의 간격이 조금만 더 줄어든다면 좋겠다고 느낀다.
네가 대학교에 가면 무척 바쁠 것 같다.
네 말대로라면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모자랄 것 같은데.
술도 먹고, 양다리도 걸친다는 너의 호언장담에 그냥 귀여워서 웃었다.
감정 표현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로 무슨 거짓말을 하겠다는 건지.
방금 유리창에 비친 네 모습에 넌 또 스스로 충격받은 표정이다.
거 봐, 그러면서 무슨 거짓말을 하면서 바람둥이 연애를 하겠다는 건지....
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모른다.
OO가 전부 말하지는 않았겠지.
사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걸지도 모른다.
너의 시험에 지장을 주면 안 되는 줄 알기에 그냥 원래 있던 자리에서 이렇게 기다리기로 했지만,
넌 내 짝사랑 상대가 궁금한 모양이다.
빙글빙글 내 대답 주변을 맴도는 너의 말들 속에 그 마음이 보여서 살짝 웃음이 난다.
떡볶이가 사라지는 동안 난 또 내일의 너를 잠깐이라도 볼 핑계를 찾아본다.
정말..., 이 삶의 고비가 얼른 끝나면 좋겠다.
네가 입시가 끝나고, 너의 꿈을 위해 한 발자국 다가서는 그 날.
나도 나의 꿈에 한 걸음 다가서서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내일 아침도 힘겹게 등교를 할 너와 함께 갈 생각을 하니 조금은 아득하다.
아침잠이 많은 너는 아직도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역시 너는 어떤 공부보다 어렵다.
마침 너는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다.
좋은 핑계가 생겼다.
늦은 시간, 잠시라도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웃을 수 있으니,
오늘도 삶의 고비를 조금은 쉽게 넘어가는 기분이다.
부디 너도 이 시간만큼은 그런 기분이 된다면 좋겠다.
내 삶은 살을 에는 것 같은 계절이 해마다 돌아오듯, 늘 고비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고비의 끝에 항상 기다려준 네가 있었다.
아니, 기다려줬다는 말은 틀렸다.
그냥, 그 자리에 ‘새삼스럽지 않은 너의 모습’으로 있었을 뿐이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그 ‘새삼스럽지 않은 날’들이...,
나에게 외치는 너의 시원 명쾌한 목소리가 모든 고비가 끝나면 만나는 반가운 답과 같았다.
너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괜찮다.
네가 모르는 건 나도 모를 테니, 난 절대로 너의 답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너의 고비 끝에 기댈 수 있는 무언가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넌 지금 내 마음 주변을 돌며 계속 내게 묻는다.
그 짝사랑의 상대가 누구인지, 자신이 아는 사람인지.
아니면 혹시라도 자신에게 그 마음을 전할지...,
그 아슬아슬한 너의 기대감에 아직은 답해줄 시점이 아니다.
내일은 창문을 통한 연락이 아니라 꼭 전화를 하라고 말하는 넌.
지금 내게 대답을 원한다.
사실 그 대답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난 조금 헷갈려 다시 웃음 짓는다.
아, 헤어질 때까지 나에게 ‘답답한 눔!!’을 외치는 너의 목소리가,
겨울바람보다 상쾌하고 시원하다.
이래서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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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속 너였던 나
그 시간 속 나였던 너
흔들리던 계절마다
내 곁에 있어 준 넌 Kind
길을 잃고 헤매도
결국엔 너를 찾는 나
이제 난 알 것 같아 다
늘 비워 둔 빈칸
답을 적을 Time
출구가 사라진 미로 속을 걷고
홀로 한심해하고
손에 쥐어진 백지 같은 매일
쏟아지는 질문들
답을 모른 채 방황하던
내 앞에 나타나 준 건
You
You always know always know
.
.
.
차갑고 공허한 미래
어떤 기대 없이 버티고 있던
무너지려던 그때
그런 내게 손을 내밀어준 너
찢긴 문제지 같던
내 삶의 정답은 늘 너였어
.
.
.
그 시간 속 너였던 나
그 시간 속 나였던 너
서툴던 계절을 지나
너라는 답을 찾은 나
샤이니 -빈칸(Kind)- 중